김명수 대법원장.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시절 벌어진 사법농단으로 인해 사법불신이 심화되는 가운데, 대법원 수뇌부의 미온적인 태도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특히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1주년을 맞도록 뚜렷한 사법개혁의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오히려 사법농단을 방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고 있다.

◇ 연이은 영장 기각에 검찰 강력 반발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25일 첫 출근길에서 대법원이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은밀히 조사했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지금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답한 바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자행된 사법농단 의혹에 대해 강력한 해결의지를 밝힌 것.

하지만 취임 후 1년이 지난 현재,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김 대법원장의 행보는 합격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법원이 검찰 사법농단 수사팀의 압수수색 영장을 대부분 기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 인물인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김모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 등 핵심 관계자들의 자택 및 사무실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은 법원으로부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7월 25일 이들에 대한 영장청구를 기각하며 “혐의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사유를 설명했다.

재판거래 의혹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도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지난달 1일 이언학 영장전담 판사는 강제징용 사건 재판거래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검찰이 제출한 법원행정처 압수수색 영장에 대해 “일개 심의관(판사)이 작성한 문건에 따라 대법관이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지난 10일에도 유해용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됐다. 유 전 연구관은 영장심사가 지연되는 사이 자신이 반출한 대법원 자료를 무단으로 폐기했고, 사법농단 의혹을 파헤치기 위한 중요한 단서들도 사라지게 됐다. 검찰은 법원이 옛 식구들을 감싸기 위해 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팀이 지난 2개월 간 서울중앙지법에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 약 180건 중 발부된 것은 겨우 20여건에 불과하다.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40여건의 경우 단 두 건이 기각을 면했을 뿐이다.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 중 90%가 기각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수사가 가능할 리 없다.

인신구속이 필요 없는 압수수색 영장의 경우 구속영장과 달리 기각될 확률이 높지 않다.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지난 2016년 약 1만7000건의 압수수색 영장 중 불과 145건을 기각했을 뿐이다.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99% 발부해왔던 사법부가 사법농단 사건에 대해서만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 사법농단 자료는 선별 공개, 제 식구 직접 고발은 회피

검찰의 수사 진행을 가로막는 법원의 영장 기각은 대법원장이 영장전담 판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김 대법원장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스스로 추진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사법농단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은 스스로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특별조사단을 꾸리고,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자행된 재판거래 등 사법남용과 관련된 방대한 양의 문건을 입수했다. 하지만 지난 6월 검찰이 수사를 위해 해당 문건의 제출을 요구하자, 약 410개의 문건을 선별해 넘겨줬을 뿐이다. 법원행정처의 하드디스크를 비롯해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등의 하드디스크는 제출을 거부했다. 대법원 측은 “제기된 의혹과 관련이 없거나 공무상 비밀이 담겨있는 파일 등이 포함돼있다”며 미제출 사유를 설명했다.

대법원은 사법농단 수사에 적극성을 보여 달라는 여론에 떠밀려 결국 지난 7월 6일 검찰의 하드디스크 복제 요구에 동의했다. 하지만 핵심 자료의 제출은 거부하면서 검찰이 자료확보를 위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은 기각시키는 사법부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김 대법원장의 사법개혁 의지에 대한 의구심을 남겼다.

또한 대법원은 지난 7일 유해용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뿐만 아니라 그를 직접 고발해달라는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운 3차장)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검찰은 신속한 수사를 위해 대법원의 고발 및 수사의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 측은 이미 수사 중인 사건에 관해 대법원이 범죄혐의 성립 여부를 검토하고 고발 등의 방식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거절했다.

대법원은 유 전 연구관이 반출한 문건이 핵심 증거물이라는 검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 전 연구관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 등은 확인 후 회수 등 필요한 조치를 검토할 예정”이라며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검찰은 유 전 연구관의 전 소속기관에서 문건을 임의 회수하는 것은 증거인멸죄가 성립될 수 있다며 우려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유 전 연구관이 반출 문건을 모두 폐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우려는 현실이 됐다.

◇ 김명수, 양승태 사람들 속에 고립?

일각에서는 김 대법원장이 사법개혁을 적극 추진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좁다며 옹호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 사법부에는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임명된 고위 법관들이 다수 포진돼있다. 김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수장이지만 이들을 상대로 대립각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하지만 대법관을 제외한 모든 법관에 대한 인사권, 법원행정처에 대한 통제권 등 막강한 권한을 쥐고서도 고위 법관들과의 갈등을 두려워해 사법개혁에 지지부진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송영무 전 국방장관의 경우 기무사 문건과 관련해 국회에서 하급자로부터 비난을 당하는 등 하극상의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기무사 해체라는 결과물을 내놓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송 전 장관은 지난달 31일 퇴임을 앞두고 “군사안보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장관의 소임을 마무리하게 돼 보람을 느낀다"며 "안보지원사 부대 역할을 확고히 정립해 국방개혁을 반드시 완성시켜달라”고 소회를 밝혔다.

군 내 기득권과 대립하며 나름의 성과를 내놓은 송 전 장관과 김 대법원장의 1년간의 행보는 크게 대비된다. '김명수 대법원'은 적폐의 온상인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사법행정회의’를 구성하자는 사법발전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비법관 외부인사가 사법행정권 행사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3권 분립에 반한다”며 반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사법불신 해소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 대법원장이 취임 1주년을 맞이해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모습을 쇄신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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