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12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상 제막식'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3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을 지연시키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이 해당 재판에 개입한 이유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16일 "박 전 대통령이 지난 2013년 11월 말 해당 재판 진행상황을 보고 받은 뒤 “큰일 나겠다. 합리적으로 잘 대처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청와대 보고 뒤인 12월 1일 김 전 비서실장은 윤병세 당시 외교부장관, 차한성 당시 대법원 법원행정처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회동을 갖고 강제징용 재판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이 강제징용 재판을 지연시키라고 지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재판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승소할 경우, 사법부가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곧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일청구권협정서 2조 1항에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명시돼있다.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지원과 2억 달러의 차관을 한국에 제공하는 대신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뜻.

대법원은 지난 2012년 5월 강제징용 피해자 이명복 씨 등 9명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소멸시효 등을 이유로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했다. 당시 대법원은 “1965년 체결된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 취지를 설명했다.

이 같은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다면 한일협정의 정당성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이는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기반이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취임 초 67%까지 치솟았던 박 전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2013년 말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 등으로 인해 50% 초반까지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강제징용 재판으로 인해 ‘반박’ 여론까지 확산되는 것은 취임 1년차의 정권에게는 치명상이 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의 핵심 지지세력에게 ‘박정희’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친일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2012년 대법원 판결 이후 서울 고등법원은 2013년 7월 신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신일본제철이 재상고 의사를 밝히면서 해당 재판은 현재 5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마무리 단계를 바라보던 재판이 5년이나 지연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제기돼왔지만, 김 전 비서실장의 증언이 나오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남은 건 검찰 수사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한편 대법원은 지난달 27일 해당 재판을 전원합의체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18년만의 일이다. 하지만 재판이 지연되면서 소송을 제기한 징용 피해자 9명 중 7명이 확정판결을 기다리다 사망했다. 뒤늦었지만 검찰의 진상규명과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유족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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