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Φύσει μέν ἐστιν ἄνθρωπος ζῷον πολιτικόν.” 흔히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곤 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런데 이는 틀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작 의미했던 바는 “인간은 폴리스에 사는 동물이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통해 인간이 폴리스의 틀 안에서만 종교적, 도덕적, 지성적 능력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도대체 폴리스(πόλεις)가 무엇이기에? 폴리스가 어떤 곳이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예찬해 마지않는 것일까? 답을 찾기 위해 고전학자 키토의 책을 펼쳤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고대 그리스는 수많은 폴리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 인구가 5천 명이 되지 않았고, 2만 명이 넘는 폴리스는 시라쿠사, 아크라가스, 아테네 셋뿐이었다. 구성원들은 혈연관계로 끈끈이 이어져 있었으며, 하나같이 공동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 업무는 왕에게 위임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귀족 가문의 수장들이나 중산층 시민들의 평의회, 아니면 모든 시민들에게 맡겨졌다. 폴리스는 원뜻인 ‘성채’뿐 아니라, 공동체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적 삶 전체를 의미했다.

폴리스를 이야기할 때면 아테네를 빼놓을 수 없다. 폴리스가 가진 모든 장점을 가장 찬란하고 탁월하게 발휘했던 도시.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정신적으로 아테네인의 후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가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600년 이전까지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한참 뒤쳐진 이류 국가에 불과했다. 생계유지에 실패한 농부들이 부유한 귀족들에게 땅을 저당 잡혔고, 나중에는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되거나 외국으로 팔려갔다. 빈부격차와 계급간의 갈등이 날로 증가하며 사회는 혼돈에 빠졌다.

그때 솔론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상인이며 여행자였고,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다. 내전 직전까지 치달은 아테네 시민들은 그에게 독재 권력을 주기로 결정했다. 솔론은 개혁의 칼을 휘둘렀다. 그는 부채를 경감시키고 토지소유를 제한했으며, 채무소유로 인한 노예화를 단번에 끝장냈다. 정치제도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아테네는 1년 임기의 ‘아르콘’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주로 귀족 가문에서 선출된 아르콘들은 임기를 마치면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아레오파고스 협의회’로 자리를 옮겼다. 솔론은 협의회의 권한을 건드리진 않았지만, 혈통자격을 폐지하고 재산자격을 도입했다. 상인계급이 지배층에 유입되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솔론은 이 모든 일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테네에는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정치적 불안정 속에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가 정권을 잡는다.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은 채 20년간 선정을 펼쳤다. 가난한 농부를 도왔고, 몰수한 토지를 분배했으며, 수도시설을 건설하여 식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디오니소스 제전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의 정책을 토대로 테스피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등 걸출한 작가들이 탄생했고, 아테네 시민들은 매년 이들의 연극을 관람하며 개인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처음으로 비극이라는 예술에 공공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공적 임무를 자신들의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을 참지 못했다. 참주정은 종식되었고, 혼란을 틈타 이사고라스라고 하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지도자가 된 인물이 바로 클레이스테네스다. 그는 씨족에 기반을 둔 4부족을 해체하고 지역 기반의 10부족 체제를 도입했다. 각 부족은 다시 ‘데모스(행정구)’들로 나뉘었고, 남자들은 18세만 되면 데모스에 등록하여 재산이나 혈연에 관계없이 민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법 앞의 평등(ἰσονομία)’이 실현된 것이다.

민회는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 없으면 한 달에 한 번 모였다. 시민이라면 무엇이든 발언하고 제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회는 너무 덩치가 컸기 때문에 긴급한 일들을 처리할 협의회가 필요했다. 이를 ‘500인 협의회(βουλή)’라 불렀다. 이들은 각 부족에서 50명씩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500명도 너무 많았기 때문에 ‘프리타네이스(πρυτάνεις)’라는 내부 위원회를 또 만들었다. 10개 부족에서 각각 50명을 차출했고, 그들이 1년의 1/10을 맡아 책임지게 했다. 이 50명 중 매일 한 명이 추첨을 통해 의장이 되어 24시간 동안 국가원수의 직함을 가졌다.

유일하게 추첨이 아닌 선출로 뽑는 직위는 10명의 군사 사령관 ‘스트라테고스(στρατηγός)’였다. 임기는 1년이며 재선이 허용되었다. 재선에 실패하면 다음 전쟁에서는 일반 사병으로 활약했다.

아테네인들이 발명한 민주주의는 50년간 매우 탁월하게 작동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렀고, 델로스 동맹을 바탕으로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스트라테고스였던 페리클레스의 리더십 아래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졌고, 아크로폴리스의 장엄한 대문과 그림 같은 회랑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마케도니아가 세력을 키우며 아테네는 쇠망의 길로 접어든다. 저자는 말한다. 아테네인들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고. 폴리스를 약화시킴으로써 훨씬 낮은 수준의 삶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아테네인들은 결국 후자를 택한다. 그들은 로마처럼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대의제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며, 또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만이 자유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테네의 멸망과 함께 종적을 감췄던 민주주의는 2,000년이 지나 화려하게 부활한다. 신대륙에서 탄생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 이곳 대한민국에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곳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 내리며, 배제와 억압을 기치로 내건 독재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폴리스의 시민들이 꿈꾼 완전하고 지적이며 책임 있는 삶,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꿈꾼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한 삶은 요원해 보인다.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테네의 1.0, 미국의 2.0을 뛰어넘는 민주주의 3.0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인류의 운명은 아마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 약력>

1998년 끝자락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여행자’,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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