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내린 내린천

“우린 여기서 3대까지 좋은 흙을 주무르며 곡식 거둬먹고 살았어. 그러나 이젠 아니다. 농사가 근본인 시절은 이제 갔다는 얘기야. 농사꾼 시절은 이제 간 거야.” -한수산 ‘유민(流民)’ 중에서

흘러간 것이 어찌 농사꾼의 시절뿐이랴. 오랜 뗏목나루터였던 합강에서 내린천 물줄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면 뗏목꾼들의 자취는 온 데 간 데 없고 거센 물살 위로 원색의 래프팅 보트들만 쏟아져 내린다. 세상은 변했다.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 대신 시간의 유희만이 물살 위에 남았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어떤 결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합강유원지 물살 위로 흘러간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유성문

오대산의 을수골에서 발원하여 장장 170여 리 길을 내달려온 내린천은 인제 합강에서 새로운 물줄기와 만난다. 그 물은 금강산 어디쯤에서거나 내설악 깊숙이에서 흘러내려온 물들이다. 여직까지 치받듯 북상하여 흐르던 내린천 물은 합강에서 짐짓 제 힘을 이기지 못해 100여 미터쯤 더 나아가고서야 겨우 몸을 틀어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거기서부터 물은 물을 더하고 더하여, 소양강을 이루고 북한강을 이루어 마침내 한강으로 흘러 먼 바다에 이른다.

내린천의 면모를 살피러 가는 길은 번잡함을 무릅쓰고라도 강 하류인 합강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유원지에다 번지점프장, 산악자전거길들, 시끌벅적한 래프팅 코스 등을 어렵싸리 벗어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내린천은 서서히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가히 ‘하늘이 내린 물줄기’이고, 한국적인 강의 원형이다. 상남에서 시작하여 미산계곡을 거쳐 광원에 이르는 길 내내 수려한 산그늘과 반짝이는 물비늘이 따라다닌다.

소설 ‘유민’의 무대가 되는 양짓말과 뒷버덩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인제군 상남면 하남리다. 예전엔 기린면 가산리에 속해 있던 곳으로, 기린면의 면소재지인 현리는 군부대로 유명한 곳이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입영 청춘들에게 가장 공포의 지역이었던 인제의 기억은 상징적으로 바로 이곳 현리에서 시작한다. 현리는 또한 방태산 자락의 소위 ‘사가리’로 들어가는 초입이기도 하다.

예전 뗏목 하나에 의지래 목숨을 걸고 오르내리던 물길을 사람들은 이제 놀이기구에 의탁하여 하릴없이 오르내린다. ⓒ유성문

‘삼둔 사가리’-. <정감록>은 ‘난을 피해 숨을 만한 곳’으로 삼둔 사가리를 들었다. 삼둔은 ‘산기슭에 자리 잡은 평평한 둔덕 세 곳’이란 뜻으로 살둔(생둔), 월둔, 달둔을 말한다. 사가리는 ‘계곡가의 마을 네 곳’으로 아침가리와 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명지거리)를 이른다. 군복색 현리에서 왼쪽으로 몸을 틀면 사가리요, 상남에서 내처 내려가면 삼둔이다. 다같이 ‘은둔의 땅’들이지만, ‘유민’들의 삶을 되짚어 가기엔 아무래도 미산계곡을 거슬러 삼둔으로 가야 한다.

미산은 조선시대 양반나리들의 피병처(避病處)였다. 율곡 이이도 열세 살 때 병을 얻어 이곳으로 피병을 왔다. 하루는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으면 병이 나을 것이나, 천 그루를 채우지 못하면 내가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율곡은 기이하다 여기면서도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그 중 한 그루를 다람쥐가 갉아먹는 바람에 딱 한 그루가 모자라게 되었다. 다시 나타난 호랑이가 약속대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데, 마침 밤나무와 흡사한 나무 한 그루가 나서며 ‘나도 밤나무’라고 외쳤다. 덕분에 화를 면한 율곡은 그 나무를 ‘너도밤나무’라 불렀다.

근처의 개인약수는 피병의 설화를 더욱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개인약수는 1893년 함경도 포수 지덕삼이 발견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약수터다. 힘겨운 비포장길을 거쳐 개인산장에 닿고서도 도보로 한 30분쯤은 더 올라가야 한다. 오죽했으면 약수 때문이 아니라 힘들게 산을 오르다보니 자연스레 병이 치유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생겨났을까.

미산계곡의 견지낚시. 강태공이 낚는 것은 단지 흐르는 것만이 아니다. ⓒ유성문

삼둔, 그 깊숙한 곳에 살둔이 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삼둔에서 그나마 ‘삶을 기댈만한 곳’이라는 살둔. 언젠가 물을 건너는 다리가 생기면서 ‘육지 속의 섬’에서 벗어났고, 최근에는 번듯한 길이 뚫리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여직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으로 아늑함과 고립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 끝자락에 살둔산장이 있다.

살둔산장은 1985년에 지어진 2층짜리 귀틀집이다. 산악인 윤두선씨가 월정사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도목수에게 부탁해 지은 집으로, ‘바람을 베고 눕는다’해서 ‘침풍루(侵風褸)’, ‘아직 완공되지 않은 집’이라 해서 ‘미진각(未盡閣)’, ‘산 반 물 반’이라 해서 ‘산반수반정(山半水半亭)’, 오가는 산악인과 여행가들이 지어놓은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사향노루가 지나간 봄 산에 풀이 스스로 향기를 낸다(麝過春山草自香)’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때를 못 만나 땅에 사는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의 ‘육침선방(陸沈仙房)’이란 액자도 걸려 있다. 살둔산장은 일찍이 ‘한국의 아름다운 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예전에 살둔산장에는 산장지기 이상호씨가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언론밥’을 먹다 산에 미쳐 어느 날 이 산장에 숨어들었다. 그렇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사람들로 인해 대작으로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 번거로움이 그를 쫓아내버린 것일까. 그는 어느 날 홀연 종적을 감추었다. 혹자는 더 깊숙한 곳을 찾아간 것이라고 했다. 원래 집주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사실이 어떠하든 그가 떠난 후 산장은 아연 기운을 잃어버렸다. 어떤 이는 마치 ‘변심한 애인’을 보는 듯하다고까지 했다. 그가 ‘지독한 은둔자’였든 아니었든 간에 어쩌면 그야말로 마지막 ‘유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둔산장을 나와 광원마저 지나치면 길은 내린천의 시원(始原)인 을수골로 접어든다. 조붓한 물줄기를 따라 시원으로 다가갈수록 물은 기억으로 반짝인다. 비록 그 길이 초행이라 할지라도 시원은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흐르는 강물에 대고 묻는다. 내가 떠나온 세상은 어떤 것이며, 내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은 또 어떤 것인가. 물은 답한다. 그저 말없이 흐르고 흐를 뿐이라고.

주인을 잃은 살둔산장 텃밭에 고추들이 익어가고 있다. 산은 가파르고 골짜기는 깊으니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유성문

나무들은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일평생을 살아간다. 움직이는 것은/ 그들의 시선뿐이다. 몸은/ 자기가 태어난 땅을 절대 떠나지 못한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팔과 다리를 잘라 강물 위에/ 던져지는 수밖에 없다. (…) 하나의 세계와 결별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하재봉 ‘뗏목’ 중에서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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