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가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네’

-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중에서

<사진 출처 = 서울시 유튜브>

지금은 종로 어디쯤 있는 상가가 됐지만 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세운상가는 진정 이 나라 대중문화를 성장시킨 저수지 같은 곳이었다. 청춘의 한때, 아니 까까머리 중·고생 시절 세운상가 근처를 어슬렁거려보지 않았다면 누구나 보증하는 모범생이었음이 틀림없다.

“어이 학생, 빨간책 찾나?”,“왔다갔다 하지 말고 문화영화나 보구가. 싸게 해줄게. 죽이는 거 들어왔어.”

‘빨간책’은 <플레이보이>나 <팬트하우스>를 말하는 거였고, ‘문화영화’는 야한 8미리 포르노 영화를 지칭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세운상가 일대는 사춘기 소년들은 물론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신입생들에는 한 번쯤 꼭 가봐야 하는 ‘성소’였다. 각종 도색잡지는 물론 그때만 해도 흔치 않던 포르노 테이프를 구입하거나 8미리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수입이 금지된 외국 팝그룹들의 LP레코드가 산더미-물론 모두 정식제품이 아닌 백판-처럼 쌓여 있어서 마니아들을 들뜨게 했다. 중간중간에 야바위꾼들이 호객을 하면서 오가는 행인들의 주머니를 노리기도 했다. 또 영화를 전공한 이들도 국내에 수입이 금지된 영화들을 복제판으로 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해서 아세아, 국도, 대한, 명보, 스카라, 중앙극장 등 개봉관들이 즐비하게 있었기에 영화관 순례에도 적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전자제품들이 싼 가격에 팔려나가던 곳이 세운상가였다. 종로부터 청계천, 을지로로 이어지는 그 공간에 일제 소니부터 파나소닉 등에서 생산된 TV나 전축을 비롯하여 워크맨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던 전자제품의 천국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자제품을 파는 상가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카세트테이프, 음반, 비디테이프 등 소프트웨어들이 공급된 것이다. 유하의 표현대로 온갖 해적판들이 욕망의 허기를 달래주던 곳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PC가 등장하면서 세운상가는 온갖 불법복제품의 온상이 됐다. 한글과 컴퓨터 이찬진 대표가 맨 처음 ‘아래아 한글’을 판매하던 곳이 세운상가였다니 가히 대한민국이 IT왕국이 되는데 기초를 다진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과 컴퓨터는 물론 삼보컴퓨터나 코맥스 등 컴퓨터 제조사들도 여기에서 창업했다. 전자 기기와 부품,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뭐든지 구할 수 있었기에 누군가는 세운상가 사람들이 합심하면 미사일과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세운상가가 몰락한 것은 86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정부가 전기 및 전자 업종을 ‘도심부적격 업종’으로 지정해 ‘용산전자상가’로 강제 이전되면서 본격화됐다. 1987년 정부는 수도권 정비 계획에 따라 용산 농수산물 시장은 송파구 가락동으로, 세운상가의 전기, 전자 상인들은 용산 등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상인들이 점차 떠나면서 세운상가가 슬럼화 되자 역대 서울시장들은 철거를 계획하기도 했으며 정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4년부터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추진,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서울시가 스타트업 회사들의 창작공간을 지원하면서 세운상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전기 및 전자기술자들과의 협업을 지원하고 있다. 도시재생의 모델이 되는 공간이자 4차 산업혁명의 메카가 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겠다는 것이 서울시의 생각이다.

각설하고, 세운상가가 비디오테이프로 다양한 영화를 감상하면서 장차 영화감독이나 배우를 꿈꾸던 청년들을 견인하고, 많은 가수나 작곡가들이 다양한 외국 팝음악을 접하는데 일조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대에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온 ‘한류바람’의 뿌리는 세운상가에서 시작된 셈이다. 여전히 서울 한 복판에 버려진 섬인 채로 남아있는 세운상가가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인지 기대된다.

 

<필자 소개>

오건은 대중문화 주변부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신명 나게 사는 딴따라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만든 콘텐츠들을 좋아하고 지지한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날까지 글을 통해 비판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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