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부석사

언뜻 보면 소백산의 깊은 품에 부석사가 안겨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부석사의 너른 품이 소백산을 보듬고 있다. 화엄의 장엄함은 비로봉 꼭대기보다 더 지극하며, 아미타의 도량은 소백의 모든 풍광보다도 무량하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에서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보다는 ‘의상(義湘)과 선묘(善妙)에 얽힌 사랑 이야기’로 부석사(浮石寺)는 세상에서 가장 높게 ‘뜬’ 절이 된다. 그래서 사랑에 애달파하는 이들은 무량수전 앞으로 무변광대하게 펼쳐진 소백준령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무량수전 동쪽 뒤편에 숨은 선묘각으로 발길을 향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찾은 이들은 으레 배흘림기둥의 두툼한 뱃구레부터 만져본다. ⓒ유성문

선묘는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난 젊은 엘리트 의상이 중국 땅에 당도해 처음 묵었던 집의 딸이다(어떤 이는 유곽의 여자였을 거라고도 한다). 첫눈에 의상에게 반한 선묘가 사모의 마음을 바치지만, 자못 결연한 의상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던 날, 선묘는 부두까지 쫓아보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상심한 선묘는 불법에 귀의하고 죽어 용으로 변해 의상이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호위한다.

후에 의상이 부석사 터를 잡을 때 선묘는 또 한 번 사랑의 이적을 발휘한다. 500명이나 되는 도적의 무리가 절을 지으려는 의상을 방해하자, 선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해 공중을 날아다니며 그들을 위협하여 쫓아버렸다. 그때의 ‘뜬돌(浮石)’은 무량수전 서쪽 뒤란에 놓인 채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끝내 이루어낸’ 선묘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다.

선묘각의 선묘상. 선묘의 애틋한 사랑에는 아랑곳없이 불자들은 자신의 기원만을 놓고 간다. ⓒ유성문

그녀의 기척에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그는 이 순간만은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시, 저 여자와 함께 나무뿌리가 점령해버린 옛집에 가 볼 수 있을는지. 이제 차창은 눈에 덮여 바깥이 내다보이지도 않는다. -신경숙 ‘부석사’ 말미

소설 ‘부석사’에는 부석사가 나오지 않는다. 부석사 가는 길만 나온다. 소설의 끝에서 ‘부석사 오기까지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녀’와 ‘남자’는 부석사를 찾아오는 길에 길을 잃어버린다. 앞은 낭떠러지, 뒤로는 바위벼랑이니 오도가도 못 하고 차안에 갇혀 밤을 맞는다. 서로 원하지 않는 사람의 방문을 피해 도망치듯 불현듯 떠나온 길이었다. 같은 오피스텔에 살던 두 사람은 붉은 벽돌집 앞 텃밭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다. 그때까지 각각 사랑의 상처를 안고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부석’은 ‘뜬 돌’이기도 하고, ‘떠 있는’ 돌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 모습은 ‘쓸쓸한 사랑’과도 닮아있다. ⓒ유성문

“부석은 무량수전 뒤에 있다는군요. 정말 돌이 떠 있는지…, 실과 바늘이 드나들 만큼 두 개의 부석 사이가 떠 있다는데.”

소설 속의 두 남녀는 작가의 필치에 의해 가보지 못한 부석사를 그려본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1년 전에 처음 부석사를 다녀왔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1월 1일이었다. 그때 마음이 어디든 길을 나서야만 하는 그런 것이었고, 말하자면 꼭 부석사가 아니라도 상관없을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목적지를 부석사로 정한 것은 그때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길을 모른다는 것과, 그곳에 가면 부석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끝내 두 남녀를 부석사까지 데려가지 않는다.

무량수전 앞 석등에는 다소곳이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양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그 미소는 ‘마음 아픈 사랑’에 잠시나마 위로를 준다. ⓒ유성문

‘선묘’와 ‘의상’의 사랑, ‘그녀’와 ‘남자’의 사랑,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아 이루어질 수도 있는 사랑들이 곳곳에 스며있는 부석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안양루 앞에 서니, 소백의 산자락에도 어느덧 해가 진다. 안양루 기둥들은 석양에 여윈 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무량수전 앞 석등도 붉은 노을빛 불을 켠다. 그 불빛, 무량수전의 해쓱한 창살에 얼핏 넘실거리는데, 이승을 떠돌던 슬픈 내 사랑도 그렇게 저물고만 있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磨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 전문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