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전 정부 시절 상고법원의 입법 추진을 위해 청와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재판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2015년 7월 양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통령 독대를 앞두고 법원 행정처가 작성한 ‘현안관련 말씀자료’는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다”는 표현과 함께, 박근혜 정부의 핵심 현안과 관련해 대법원이 정권에 유리한 판결을 내린 사례들이 열거돼있다. 해당 문서에 제시된 대법원의 정부 협력 사례에는 KTX 승무원 해고 무효소송,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등이 포함된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거래’라는 무리수까지 두며 박근혜 전 정부에 협력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상고법원’ 설치 때문이라는게 다수 법원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실제로 양 전 대법원장은 2015년 8월6일 박 전 대통령과의 오찬 회동 내내 상고법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으나,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이 제지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설치에 집착한 까닭은 무엇일까.

◇ 상고법원제, 위헌소지 많아 법조계 내부에서도 논란

상고법원제는 상고심에서 다룰 사건 중 일부 중요 사건을 대법원에 배정하고, 그 외 대부분의 사건을 상고법원으로 보내 대법원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취지로 제안된 제도다. 상고법원제 도입을 위한 대법원의 노력은 양 전 대법원장이 재직 중이던 2014년, 대법원장 산하 사법정책자문위원회에서 상고법원 설치를 대법원장에게 건의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2015년 상고법원을 신설하고 판사 3명으로 구성된 부에서 전원일치 의견으로 상고심을 다루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홍일표 당시 새누리당 의원 대표로 발의됐다.

상고법원제를 주장하는 쪽은 현행 3심제 하에서 대법원에 과중한 업무가 몰리는 것을 이유로 꼽는다.  상고법원을 설치해 대법관들의 과중한 업무를 줄이면, 재판의 질도 훨씬 높아질 수 있다는 것. 이는 외견상 타당하게 들리지만 법조계 내부에서는 오히려 반발하는 의견이 더 많다.

우선 상고법원제는 개헌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현행 헌법은 법원을 대법원 및 대법원과 심급을 달리 하는 각급 법원으로 조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상고법원의 경우 대법원과 같은 상고심을 관할하기 때문에, ‘각급 법원’으로 분류할 수 없다. 따라서 상고법원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법원 조직에대한 현행 헌법의 규정을 수정해야만 한다.

또한 당시 발의된 법원조직법 개정안에 따르면 상고법원에서 전원일치 의견이 나오지 않거나 재판결과가 헌법이나 판례에 위배될 경우 대법원에 특별히 상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는 현행 법원조직법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으로 구성된 3심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상고법원 도입 시 실질적으로는 4심제가 시행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법조계 내부에서는 상고법원과 대법원이 다를 사건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국민들이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지난 1961년 고등법원 내에 상고부를 두는 고등법원 상고부제, 1981년 대법원이 상고심에서 다룰 재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상고허가제 등이 도입된 바 있으나, 이 같은 이유로 인해 각각 1963년, 1990년에 폐지됐다.

◇ 상고법원 설치 시 대법원장 인사권 강화

그렇다면 법조계 내부에서도 반발이 많은데다 헌법 및 각종 법률의 개정을 요구하는 ‘상고법원제’라는 복잡한 사안을 양 전 대법원장이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고법원제 도입이 대법원 및 대법원장의 권력 강화와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가 2015년 발표한 ‘상고법원 반대 및 대법관 증원 10문10답’에 따르면 대법원 업무부담 경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 50명에서 최대 100명의 상고법원 판사가 필요하다. 상고법원 판사들에 대한 임명권은 누가 가지게 될까? 현재 대법원을 중심으로 피라미드식 서열구조를 이루고 있는 법원 조직 시스템을 고려할 때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독점할 가능성이 높다.

상고법원의 도입은 사법부의 서열구조 최상부에 하나의 층을 더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최대 100명의 상고법원 판사 보직이 신설될 경우, 판사들이 승진을 위해 인사권을 독점한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는 현상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법조계에서는 가뜩이나 관료화된 사법부에서 상고법원이라는 새로운 ‘카스트’가 만들어진다면 사법부 내의 위계서열이 더욱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법조계의 전관예우 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 상고법원 설치로 고위 판사가 다수 배출될 경우 더 큰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부작용은 상고법원제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대법관 증원안과 비교할 경우 명확하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대법원의 업무부담이 문제라면 대법관의 수를 늘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대법원장 및 대법관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기 때문에 대법원장의 인사권 독점 및 사법부의 피라미드화 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또한 최종심을 담당하는 사법부의 최상층의 임명권을 국민이 간접적으로 행사하도록 규정한 현행 헌법의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대법관 증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부작용이 명확한 상고법원제보다는 설득력있는 대안이라는 점은 법조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1일 기자회견에서 “제가 재임 시에 상고법원을 추진했던 것은 여러분들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대법원의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라며 상고법원 추진에 다른 의도가 없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상고법원제와 대법원장 권한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양 전 대법원장의 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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