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재판 거래’ 의혹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재판 거래로 피해를 입었다는 단체 및 개인들이 대법원 앞에서 연일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고, 사법부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이자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인 최기상 판사는 28일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하여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양승태 사법권 남용’을 비판했다.

최 판사는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의 무리한 입법 추진 등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해 성향과 동향, 심지어 재산 관계까지 파악하고, 좋은 재판을 향한 법관들의 학술 활동 자유를 침해한 것은 반헌법적 행위'이다. '대법원장에게 이번 조사결과 드러난 헌정유린행위의 관련자들에 대해 그 책임에 상응하는 엄정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주장했다.

최 판사는 또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재판 거래 의혹을 사고 있는 'KTX 승무원 판결‘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삶을 비극으로 바꿔 놓았다”고 비판했다. 최 판사는 이어 “전국법관대표회의도 법관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해 조사 결과의 후속조치를 마련하겠다”라고 강조해 후속 대응 방침을 시사했다.

각급 법원들도 잇따라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있다. 의정부지법 단독·배석 판사 회의를 시작으로, 다음 달 4일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 회의, 서울가정법원 단독·배석 판사 회의를 갖는 등 전국 지방법원 단위의 법관회의가 잇따라 예정돼 있다. 법관들은 양승태 대법원 뿐 아니라 특조단까지 ‘봐주기식 조사’를 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비판이 확산되자 특조단을 이끈 안철상 처장은 비공개했던 재판거래 의혹 문건을 추가로 공개할 뜻을 밝혔다. 앞서 특별조사단은 지난 25일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총 410개의 의혹 문건을 확보했지만, 사생활 침해 등을 고려해 문건 목록만 공개하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속 대표판사들은 “단순 열람이 아니라 모두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이 있는 문건을 완전히 공개하라는 것.

특별조사단이 '열람 방침'을 고수할 경우, 전국법관대표회의는 6월 11일 임시회의를 열고 문건공개 요구 안건을 의결해 대법원장에게 정식 권고할 계획이다.

법관들의 이런 움직임은 대법원 현 수뇌부 퇴진까지 거론할 수 있는 분위기여서 지난 2003년 제4차 사법파동에 이어 15년만에 사법 파동이 재발할지 주목된다.

◇ 제1차~4차 사법파동 전말

1971년 발생한 제1차 사법파동은 공안 검사를 앞세워 사법권을 침해한 대표적 사례다. 전국법원 판사 455명중 150여명이 이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태를 무마했으나 주동급 판사가 사임하고 대법원 판사가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등 사법부 독립이 크게 훼손됐다.

제2차 사법파동은 노태우 정권 출범 이듬해인 1988년 2월 서울·수원·부산·인천지역 소장판사 430여 명이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며 발생했다. 이로 인해 김용철 대법원장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이일규 대법원장이 취임했다.

제3차 사법파동은 1993년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판사들 40여명이 모여 사법부 개혁을 요구하며 확산됐다. 당시 판사들은 사법부 독립 강화와 법관의 신분 보장, 법관회의를 요구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김덕주 대법원장이 스스로 물러났다.

제4차 사법파동은 2003년 서울지법 북부지원 박시환 판사가 대법관 인선 관행에 항의하고 우리법연구회 등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첫 헌법재판관에 임명되고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첫 대법관이 되는 등 사법부의 양성 평등 정착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목할 점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당시에도 일선 판사들로부터 반개혁적 인물로 지목돼 갈등을 벌였다는 점이다. 당시 양승태는 법원 행정처 차장으로 재직하며 우리법 연구회를 비판하고 상고법원 설치를 강하게 주장해 소장 판사들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