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리 가는 길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성장한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만석꾼’의 토지란 전라도 땅에나 있었고, 경상도 안에서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그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했다. (박경리)

산동마을 가는 길. 아낙은 산수유 그늘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고, 어떻게 알았는지 복술이가 멀리 마중을 나왔다. ⓒ유성문

그때 작가가 작품의 무대를 경상도가 아닌 전라도로 정했다면 어떠했을까. 평사리로 가기 위해 지리산 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마냥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니다. 88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남원쯤에서 내리면 길은 지리산 기슭을 흘러간다. 전라의 북과 남을 가르는 밤재터널을 지나면 구례군 산동면이다. 봄이 오면 이 일대는 산수유의 노란 꽃으로 뒤덮인다.

잘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자리 절어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산동애가’ 중에서

푸성귀 몇 줌으로 좌판을 차린 아낙과, 그래도 아직은 젊은 대장장이 등이 모여 구례장터를 꾸려간다. ⓒ유성문

지리산 골짜기마다 숨어있는 사연은 무겁고도 고달프다. 그 많은 사연들이 ‘토지’를 이루었다면 연면한 평사리의 ‘토지’와는 또 다른 줄거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구례장터 역시 화개장터와는 그 내음부터 다르다. 어딘지 억센 화개장터와는 달리 구례장터는 왠지 유순하게만 느껴진다. 누구는 구례장터를 일러 ‘작은 지리산’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로쇠물로부터 시작하여 두릅, 더덕, 고사리, 취나물, 가죽나물, 도라지, 죽순 등과 산수유, 작설차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에서 나는 온갖 산것들과, 은어와 참게 같은 섬진강의 물것들, 목기와 유기 같은 사람의 것들까지 무시로 들고나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십상인 때문이다. 어찌 그뿐이랴. 대장간에 방앗간에, 그 일하는 손들과, 그 근육에 짠기를 돋워줄 먼 바다에서 온 비린 생선들, ‘동동구르무’에 품 넓은 속곳들, 철모르는 강아지까지, 어찌 보면 지리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들이 뒤섞여 형형색색을 이룬다.

운조루 문설주에는 유이주가 때려잡았다는 호랑이 턱뼈가 걸려 있다. ⓒ유성문

운조루는 또 어떤가. 그 집이 위치한 지명부터 토지면 오미리다. 토지면 오미리 구만들 일대는 금환락지, 곧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터로 알려져 왔다. 구만들 한가운데 앉아있는 환동 박부잣집 터는 정말 금환락지처럼 둥그렇게 담을 쌓고 대숲을 둘러놓았다. 운조루는 우리나라 3대 명당터 중에 하나인 오미리에서도 상대 금구몰니에 자리 잡은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이다. 1776년 이 집은 지은 유이주는 조선시대 무관으로, 어려서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힘이 세고 기개가 뛰어났던 인물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런 상징인 듯 문설주에는 지금도 호랑이 턱뼈가 걸려 있기도 하다. 또한 사랑채 누마루 밑에는 옛 주인이 사용하였던 거대한 수레바퀴가 놓여 있어 어떤 끊임없는 연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종자뜰’이라 불리는 운조루 앞뜰에 서면 마치 소설 속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영락없는 ‘토지’이고, ‘토지’보다 더한 ‘토지’이기도 하다.

평사리 최참판댁이며 악양뜰이며 봄빛이 완연하다. ⓒ유성문

1897년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그려보려면 이미 늦었거나 아직 이르다. 지리산의 다락논들은 고즈넉하고 논배미에는 쓸쓸함마저 묻어난다. 그러나 가만히 귀기울여보라.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고로쇠나무는 꿀럭꿀럭 자꾸만 물을 토해내고, 그 물들 흘러 섬진강의 재첩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 물들은 다시 산을 거슬러 곳곳에 꽃들을 피워낸다. 청매실농원의 매화를 필두로, 산수유가 피고, 벚꽃이 피고, 이윽고 지리산은 온통 꽃대궐이 되리라. 이미 봄, 한껏 물오르기 시작했으니.

굳이 평사리의 ‘토지’ 재현단지까지 오를 필요조차 없다. 악양뜰에 서면 너른 들판에 소나무 두 그루 소슬하니, 눈앞으로 파노라마가 연신 스쳐 지나간다.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만 해도 작가는 평사리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그곳을 지나치며 들은 이름만으로 그토록 장구한 소설의 무대를 만들어냈다. 나중에 한 독자가 최참판댁의 모델이었을 법한 평사리의 조부잣집 사진을 찍어다 보여주자 오히려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자기가 그렸던 것과 너무도 흡사한 그 모습에. 작가만한 상상력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의 체취 하나 느낄 수 없고 지은이의 정성조차 보이지 않는 전시공간보다는 그저 고샅길이라도 거닐며 이곳은 최참판댁, 이곳이 김훈장네, 이곳은 평산이 살던 집… 하며 마음속으로나마 그려볼 일이다.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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