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백기를 들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현재의 2.75%에서 2.5%로 0.25%포인트 낮춘 것이다.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연 3%에서 2.75%로 내린 후 7개월 만에 취해진 조치다.

이로써 한은과 당정청(黨政靑) 간의 금리 인하 논쟁도 일단락됐다.

정치적 압박에 굴복했다는 평가를 감수하고도 한은이 금리를 내린 데는 더디게나마 경기가 회복될 것이란 확신이 줄어서다. 생산·투자·수출·고용 등 주요 실물지표 부진이 계속된데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조차 여섯달째 1%대에 머물러 저성장 고착화가 우려되는 형국이다.

◇한은, 정부에 항복…경기회복 지원 사격

금통위는 이 날 전체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2.5%로 내렸다.

금리 인하에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던 김 총재가 입장을 바꿨다. 김 총재는 9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번 결정은 만장일치가 아니다. 한분이 소수의견을 냈다"면서 "(총재가) 소수의견을 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책방향을 달리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박원식 부총재도 '동결'을 주장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김 총재의 추천으로 임명된 문우식 위원도 김 총재와 박 부총재의 뜻을 같이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금리 인하로 급선회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그렇다면 관료 출신인 임승태 위원이 '동결표'를 행사한 것이 된다. 하성근 금융통화위원은 올 초부터 금리를 내려 경기회복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정해방, 정순원 위원은 지난달 0.25%포인트 인하 쪽으로 선회한 바 있다.

강경했던 동결 스탠스를 바꾼 것이 정책공조 차원에 있다. 그동안 한은은 미약하게나마 경기 회복 추세로 가고 있다고 진단해 왔다.

하지만 올해 성장률이 당초 예상보다 크게 떨어진 2% 중반대의 저성장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데다 엔저 현상과 대북 리스크라는 악재까지 보태진 현 상황을 더이상 간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3.0%→2.3%)와 한은(2.8%→2.6%)에 이어 민간 경제연구원들도 잇따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췄다. LG경제연구원은 3.4%에서 3.0%로 내렸고, 전날에는 금융연구원이 2.8%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4월 수출액이 462억9800만 달러로 전년대비 0.4% 늘었지만, 엔저 여파로 대(對)일 수출액은 11.1%나 줄어들었다. 지난 2월(-17.1%)과 3월(-18.2%)에 이어 석달째 두자릿수 감소세다.

광공업생산은 3개월 연속 줄고, 서비스업(-1.0%)과 건설업(-3.0%), 공공행정(-7.1%) 모두 감소했다. 설비투자는 1년 전보다 9.2% 나빠졌다.

취업자 수 증가 폭은 두 달째 20만명대에 머물렀고, 3월 고용률(58.4%)은 전년동월대비 0.2%포인트 하락했다. 높은 물가 만큼이나 6개월 연속 1%대의 낮은 물가상승률도 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계속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한은이 경기회복의 결정적 근거로 보는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전기대비 0.9%)은 논란거리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0.9% 성장이 기저효과나 착시효과를 고려하면 충분한 회복세가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국 중앙은행의 잇따른 금리 인하도 한은 금통위의 결정에 큰 영향을 줬다. 그동안 한은은 주요국 중앙은행과의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해 왔어서다.

2일(현지시간) ECB가 기준금리를 연 0.5%로 0.25%포인트 내린 지 하루만에 인도중앙은행(RBI)도 동참했다. 7일에는 호주중앙은행(RBA)이 사상 최저치인 연 2.7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헝가리도 연초부터 매달 0.25%포인트씩 네 차례나 금리를 내려왔다.

오현석 삼성증권 책임연구위원은 "한은이 의사결정에 있어 중요시 여기는 ECB가 금리를 인하한 것은 글로벌 정책공조를 중시하는 김 총재의 동결 주장은 명분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재는 "금리를 내릴 때 어디까지 하한이 될 것이냐가 중요한데,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는 0%다"라며 "한은이 국제공조라 하는 것은 선진국과 같은 수준을 가겠다는 게 아니라 변화할 땐 같이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7조3000억원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이 지난 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민간 투자를 독려하면서 한은의 금리인하 공조가 절실하다는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도 외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해석이 있다.

전 날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가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한은이) 자칫 청개구리 심리를 갖거나 호주산 나무늘보의 행태를 보이지 말라"면서 "국민경제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은은 (경제 위기에) 선제적 대응 능력을 보여줘야만 비로소 독립성을 존중받을 수 있다"면서 한은의 아킬레스건까지 건들렸다. 그는 지난달 29일에도 "4월에는 (금리를) 동결했지만 5월에는 알아서 잘 판단하리라 본다"고 말한 바 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벤처기업인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기준금리와 환율에 대해 "코멘트 하지 않겠다"면서도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저성장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라며 우회적으로 한은에 금리를 낮춰줄 것을 종용했다.

이에 대해 김 총재는 "현 통화정책도 완화적이지만 추경이란 새 정부의 정책 변화와 ECB 등 주요국의 금리 변동으로 인해 더욱 완화적으로 만들 필요가 생겼다"면서 "추경이 성장률을 0.3~0.4%포인트, 금리인하가 0.2%포인트 더 올리면 내년 성장률을 4%대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 논쟁 수그러졌지만…한은 체면 구겨져

한은의 강경했던 태도를 선회함에 따라 경기 상황을 둘러싸고 격렬했던 정부와의 설전은 꺼질 분위기다. 그러나 한은 입장에서는 개운치 못하다. 무엇보다 김중수 총재의 리더십에 금이 갔다.

김 총재는 그동안 금리를 내릴 의향이 없음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델리 발언'의 경우 금통위 1주일 전에는 향후 통화정책 방향과 이를 시사할 수 있는 금융·경제에 관한 사항을 일체 언급하지 않는 관행마저 깬 것이여서, 사실상 금리 동결을 암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김 총재는 지난 3일(현지시간) ASEAN+3(동남아시아국가연합+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 참석 후 기자들과 만나 "지난해 7월과 10월 50bp(1bp=0.01%포인트) 내린 것은 굉장히 큰 것이다. 미국과 일본도 아닌데 어디까지 가란거냐"면서 "올해 1~3월에 정책조합을 계속 강조한 것은 새로 들어설 정부에 'your turn(네 차례다)'이라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내수 부양하는 데 한은이 힘을 보태줬으면 하는 바람 아니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생각을 정치적·사회적으로 할 수는 있겠지만 (한은이) 일일이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김 총재가 자신의 패를 꺼내보인 상황에서 금리 인하가 결정됐다고 해서 입지가 좁아졌다고 보긴 어렵지만, 면이 서진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총재는 "지난달에 이어 이번에도 올바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추가 금리 조정에 나서는 데 조심스러운 태도다. 그는 "사전적으로 (금리를) 어떻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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