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7일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추모집회 광경.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경찰이 최소 수량을 제외하고 최루탄 전량을 폐기할 계획을 발표했다. 한때 화염병과 함께 시위 현장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최루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예정이다.

경찰은 5일, 경기남부경찰청이 지난달 말 기동부대 및 30개 경찰서에 보관 중이던 최루탄 중 약 3만5000발을 폐기처분했다고 밝혔다. 이는 2월말 경찰청이 최루탄 폐기처분 방침을 전국 지방경찰청에 하달한데 따른 조치다. 경기남부경찰청은 25개 기동부대 및 20개 경찰서에 총 1만2000발의 최소 수량만을 남겨 둔 상태다. 경찰은 경기남부경찰청을 시작으로 오는 10월까지 최소 필요량만 남기고 전국에 보관된 최루탄을 폐기할 예정이다. 서울지방경찰청 또한 오는 9월까지 최루탄을 폐기할 계획이다.

이로써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품 중 하나인 최루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호흡곤란을 일으켜 눈물이 흐르게 되기 때문에 ‘최루탄’(催淚彈, tear gas)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영문으로는 ‘riot control agent’(폭동진압작용제)라고 불리는 만큼 애초에 진압용으로 설계된 화학물질이다. 1925년 제네바 의정서에 따라 전쟁지역에서의 사용은 금지됐지만, 시위 진압 효과가 탁월해 여러 국가에서 치안 유지 용도로 오랫동안 사용돼왔다.

보통 최루성분이 담긴 탄환을 유탄발사기 등을 개조한 장치를 통해 한발씩 발사하는 형태였지만 대규모 시위 현장에서는 다연발 최루탄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시위진압용 차량을 활용하는 다연발 최루탄은 먼 거리에서 발사되는 데다 한꺼번에 다량의 최루탄이 반경 수십 미터를 채울 정도로 최루가스를 토해내 시위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사방팔방으로 최루탄이 튀어오르는 모습이나, 최루가스에 뒤덮인 시위다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 때문에 다연발 최루탄은 시위대로부터 ‘지랄탄’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축소해 휴대하기 좋은 형태로 만든 수류탄형 최루탄도 80년대 시위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사과와 모양이 비슷해 사과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최루탄은 주로 사복 경찰들이 휴대해 시위대 사이로 던져 넣는데 사용됐다. 직격의 위험은 덜하지만 시위대를 좁은 장소로 몰아넣은 뒤 사용된다는 점에서 공포감은 더욱 컸다. 튀어오른 파편에 상처를 입거나 화상을 당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최루탄의 국내 생산이 시작된 것은 1975년부터지만, 최루탄이 독재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4.19 혁명부터다. 4.19 한달 전인 1960년 3월 15일, 마산상업고등학교 김주열(17)군이 시위 도중 왼쪽 눈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것. 김군의 사망 소식은 4월11일 그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알려졌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최근 영화 ‘1987’로 화제가 된 6.10 민주화운동에서도 같은 사건이 반복됐다. 6.10을 하루 앞둔 1987년 6월 9일 ‘6.10대회를 위한 범연세인총궐기대회’에 참여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이한열(22)씨가 최루탄에 머리 뒤쪽을 직격당한 것. 이씨는 바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같은해 7월5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피흘리는 이씨와 그를 부축하는 친구의 사진은 마치 민주화 역사를 한 장면으로 압축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씨를 동료가 부축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최루탄은 독재의 상징이자 시대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소품이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 드라마 등에서 등장인물이 최루가스로 뒤덮인 거리를 콜록거리며 헤쳐 나오는 장면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최루탄이 수시로 시위진압에 사용되면서 최루탄 제조업체들도 군사독재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다. 1987년에는 최루탄 제조업체인 삼양화학공업 한영자 회장이 28억의 소득세를 납부해 전국 1위에 오르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최루탄은 종종 시위 현장에서 사용됐으나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경찰이 ‘무(無)최루탄’ 원칙을 발표하며 현역에서 은퇴하게 됐다. 그러자 국내에서 설 자리를 잃은 최루탄이 해외로 수출돼 다른 나라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1990년대에는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독립시위를 진압하는데 한국산 최루탄을 사용했고, 바레인도 2011~2012년 약 150만발의 최루탄을 수입해갔다. 불과 인구 120만명의 섬나라인 바레인에서 사용된 한국산 최루탄으로 인해 총 3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난 2014년에는 터키에서 15살 소년이 시위 도중 한국산 최루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비슷한 성분의 최루액과 강력한 수압의 살수차가 최루탄의 자리를 대신했다. 지난 2015년 4월18일 세월호를 추모하는 범국민대회에는 경찰이 살수차를 통해 캡사이신 성분으로 된 최루액을 살포하기도 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날 하루 사용된 최루액만 무려 456.75리터. 하지만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정농단 반대 집회에서는 비교적 최루탄·최루액이 없는 시위가 이뤄졌다. 민주화 인사들에게는 국가 폭력 그 자체와도 같았던 최루탄은 시위현장에서 물러난데 이어 이제 완전한 폐기 절차로 들어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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