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1월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제주도민들. <사진=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이코리아올해 4월3일은 제주 4.3 사건 발발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제주시 4.3평화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에서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하며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겠다”고 약속했다. 70년이 지난 사건을 두고 ‘완전한 해결’을 언급한 문 대통령의 발언에 4.3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법 하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제주 4.3 사건이 아직 우리 사회가 풀지 못한 미완의 과제임을 상기시킨다. 문인들이 되살리기 시작한 4.3의 기억은 학계,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역사 속에 묻히지 않고 재평가되고 있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많은 오해를 겪고 있다. <이코리아>는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던 제주 4.3 사건을 둘러싼 대표적인 오해들을 되짚어봤다.

◇ 제주 4.3은 남로당에 의한 좌익 폭동?

4.3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시작된 참사라는 인식은 오랫동안 제주 4.3 사건을 이념 논쟁의 테두리에 가둬 온 오해다. 실제 제주 4.3사건의 발발 원인은 1947년 3.1 발포사건부터 시작된 경찰과 시민들의 갈등이다.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대회가 끝나고 가두시위가 진행되던 과정에서 한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굽에 채였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다 군중의 항의에 부딪히게 된 것.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오해한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해 6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이후 제주 시민들은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희생자 보상 등을 요구하며 민관합동파업 등을 통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들도 시위를 주도했지만 당시 제주의 여론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시민에게 발포한 경찰을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일부 경찰들이 파업에 동조하는 한편, 미군 정보보고서조차 경찰 발포에 대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미군정당국과 경찰은 시민들의 항의를 좌익 선동에 의한 분란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탄압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후 육지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넘어오면서 파업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이 자행됐다. 수천 명의 수감자와 피해자를 낳은 검거 선풍은 이듬해 4.3 사건 발생을 야기한 민관갈등의 핵심 원인이다.

실제로 남로당이 무장대를 조직하고 경찰과 갈등을 빚은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의 희생자는 무장대가 아닌 제주시민들이었고 그마저도 국가 권력에 의한 희생자였다. 무장대 규모 또한 500명 수준으로 이중 총기로 무장한 사람은 절반 수준이었다. 게다가 4월3일 시작된 무장봉기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로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4월3일 하루가 아닌 7년간 지속된 검속

흔히 사건이 발생한 날짜에 따라 명명된 사건의 경우 그날 하루, 혹은 그날을 전후한 수일 간 진행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1 발포사건으로 시작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 이어지는 7년간의 사건이다. 대부분의 피해는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부터 이듬해 봄까지 1년간 집중적으로 발생했지만, 그 이후에도 수년간 소위 ‘빨갱이’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진행됐다.

1948년 대한민국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 당해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으며 군경토벌대가 결성돼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된 이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피해 또한 무장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감내해야 했다. 겨우 4.3 사건의 여파가 가라앉을 즈음에는 다시 한국전쟁이 발발해 이념을 내세운 검거와 학살이 이어졌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7년간 제주도에서 발생한 총 희생자 수는 약 1만4천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학계 및 시민단체들은 피해 규모를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 가량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의 8분의1에 해당하는 수치다.

◇ 미군정  강경 입장의 배경

제주 4.3 사건은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니다. 당시 남측에는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이었고 미군정이 행정을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 5.10 단독선거를 앞두고 일어난 4.3 사건에 대해 미군정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고 진압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딘 소장이 진압 작전을 진두지휘했으며, 5월12일에는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이 현장 지휘관으로 파견됐다. 브라운 대령은 “(무장 대립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강경파로 비민분리 정책을 추진하며 제주도민 6천여명을 구금하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결국 미국은 4.3 사태에 단독정부 수립 이전에는 최고책임자로서, 이후에는 방조자 또는 협력자로서의 관여해온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시카고대학교 브루스 커밍스 석좌교수는 지난 2016년 제6회 4.3평화포럼에서 “4.3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된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그러나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미국 지도자들은 반란세력을 강경 진압할 것을 명령했고, 마침내 진압된 것에 만족해했다”며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국내 시민단체와 유족들이 미국의 진정성있는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4.3 사건 진상 규명 걸림돌 여전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주 4.3 사건은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아닌 이념 대립에 따른 정치적 사건이라는 오해 속에 놓여있다. 좀 더 가까운 역사인 5.18과 6.10이 얼마 전 발의된 헌법개정안 전문에 포함된 것과 비교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추념식에서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제는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이날 추념식에 참석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주 4.3희생자 추념식은) 건국 과정에서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좌익 폭동에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는 글을 올려 논란을 빚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무관심과 오해가 70년 동안 지속되는 상황에서, 진정한 사과와 진상규명을 통한 4.3의 ‘완전한 해결’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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