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한 책 '블랙박스'의 출간 기자회견에서 저자 이토 시오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일본외국특파원협회 유튜브 채널 캡처>

[이코리아] 지난해 10월 미국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고백 이후 문화계와 정치계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가까운 일본에서는 오히려 성폭력 고발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미투 피해자 비난하는 일본 사회

일본판 ‘미투’ 운동의 시작은 오히려 한국보다 빨랐다. 지난해 5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가 방송사 고위간부로부터 당했던 성폭력 피해를 고백한 것. 시오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지난 2015년 일본 민영방송사 TBS의 워싱턴지국장 야마구치 노리유키에게 호텔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토는 의식을 잃은 자신을 야마구치 지국장이 끌고가는 모습이 녹화된 호텔 CCTV 영상과 택시운전사의 증언까지 확보해 검찰에 제공했다. 하지만 아베 일본 총리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등 정권 핵심의 최측근으로 불려온 야마구치 지국장은 불과 2개월 만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더 큰 문제는 검찰 처분에 분노한 이토가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실을 폭로하자 나온 일본 사회의 반응이었다. 온라인상에서는 이토가 먼저 노리유키 지국장을 유혹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상급자의 인생을 망치려 한다는 댓글이 주를 이뤘으며, 미투 운동의 동력이 돼야 할 여성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동참했다. 이토는 이러한 경험을 묶어 지난해 10월 ‘블랙박스’라는 책을 출간했으나, 여전히 사회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용기있게 피해 사실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적 지탄을 받은 성폭력 피해여성의 사례는 이토 외에도 다수 존재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여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들의 컨설팅 업체 AMF를 창업한 것으로 유명한 시이키 리카 또한 지난해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기업인으로부터 성관계를 요구받았다가 거절해 계약이 무산됐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리카의 ‘미투’ 고백에 대해 ‘노이즈 마케팅’이라며 오히려 비난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이처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미투’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낮은 성범죄율, 더 낮은 신고율

일각에서는 일본의 성범죄율이 한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와 비교해 매우 낮기 때문에, 미투 운동이 활성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여성 인권 후진국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성범죄율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이다. 2013년 유엔마약범죄연구소(UNODC)가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03~2008년 인구 10만명 당 강간피해자 수는 일본의 경우 1.2~1.9명 수준이었다. 한국은 2003~2004년까지의 통계만 나와 있으나 약 13명으로 일본의 6배 수준이다.

하지만 이를 토대로 일본의 성범죄율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범죄율은 신고율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수치이기 때문.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일수록 성범죄 사실을 신고하는 것이 어려워 성범죄율이 낮아지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여성 인권이 낮은 무슬림 국가의 경우 해당 통계에서 대체로 일본과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같은 기간 인구 10만명당 강간피해자 수는 카타르가 1.5~1.6명, 터키 1.4~2.5명, 요르단 1.4~1.9명, 아랍에미리트(UAE) 1.2~1.7명, 이집트 0.2~0.3명 정도다. 이 국가들이 한국보다 성의식이 진보적이며 여성인권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대로 여성인권이 보장된 소위 ‘선진국’일수록 피해자 보호 제도가 잘 정비돼있어 신고율이 높기 때문에 범죄율 또한 높게 측정된다. 해당 통계에서 인구 10만명 당 강간피해자 수가 가장 높은 것은 스웨덴으로 2008년 기준 155.8명이다. 같은 해 영국(잉글랜드·웨일즈)은 74.8명, 독일 69.0명, 프랑스 38.7명을 기록했다. 이는 이들 국가가 성범죄에 둔감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예민해서 나온 결과다.

반면 일본은 성범죄가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신고 확률이 매우 낮다. 일본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JILPT)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근로자의 28.7%가 직장 내 성폭력을 경험했으며, 정규직은 무려 34.7%가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 중 4분의 3은 피해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겨우 4%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폭력을 범죄보다는 평범한 일처럼 치부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기 ‘미투’ 운동뿐만 아니라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호 자체를 가로막고 있는 것.

◇ 성폭력에 무감한 일본, ‘미투’는 언제쯤?

성범죄에 대한 일본 사회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프랑스에 거주 중인 일본 여성 사사키 쿠미는 지난해 ‘치한’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12세부터 18세까지 지하철로 통학하면서 겪었던 성추행 경험과,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다 자살시도까지 했던 과거를 고백했다. 저자는 집필 이유에 대해 “많은 일본 사람이 치한을 사소한 문제로 생각한다”며 “‘성추행을 유발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이란 식의 일러스트 가이드 같은 것만 봐도 그렇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성추행에 둔감한 일본 사회의 모습은 공중파 방송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지난 2013년에는 일본의 유명 방송인 미노 몬타가 TBS 아침방송 중 여자 아나운서 요시다 아키요의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대는 모습이 그대로 방영되기도 했다. 광고가 방송되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한 미노 몬타가 손을 뻗자 요시다 아나운서가 간신히 웃는 표정을 유지한 채 필사적으로 뿌리치는 장면이 화제가 되 잠시 일본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하지만 결국 해당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것은 가해자 미노 몬타가 아닌 피해자 요시다 아나운서였다.

결국 이러한 사회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일본에서 ‘미투’ 운동의 확산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요네무라 코이치 기자는 지난 6일 아리랑TV의 ‘포린 코레스폰던츠’(Foreign Correspondents)에 출연, “한국의 미투 운동이 1월 말 현직 여성 검사의 고발로 시작된 후 폭발한 것에 놀랐다”며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일본에서의 미투 운동은 매우 느린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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