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100원짜리 지나간다’ 상처가 복이 됐어요”

하루 100원씩 이웃에게 기부하는 삶을 실천해온 100원회 김희만 회장.

[이코리아] 지난 19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00원씩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운 사람이 있다. 바로 100원회의 창립자 김희만 회장이다. 김 회장은 100원회 창립 이후 회원들과 함께 소년소녀가장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독거노인들에게 무료 영정사진을 제작해주는 등 다양한 형태의 나눔을 실천해왔다. <이코리아>는 김 회장을 만나 그 따뜻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 회장이 100원회 창립을 결심하게 된 것은 IMF로 온 사회가 얼어붙었던 1999년이다. 당시 광주 서구청 6급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김 회장은 출근길에 본 짤막한 기사에 눈길을 빼앗겼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아들에게 고깃국을 먹이고 싶었던 가난한 홀어머니가 슈퍼에서 고기를 훔쳤다가 구속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기사를 읽고 나서 우리 어머니가 떠올랐다. 만약 내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다면 우리 어머니도 나에게 고기를 먹이고 싶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IMF라서 전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공무원 신분으로 죄책감도 느끼던 터였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큰 돈은 아니더라도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김 회장의 말이다. 고민 중이던 김 회장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서랍속에 들어있던 100원짜리 동전들이었다. 김 회장은 우연히 서랍을 열었다가 동전을 발견하고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하루에 100원씩이라도 모아서 어려운 이웃들을 돌본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 회장은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찾기 위해 생활정보지에 “하루 100원으로 이웃을 도웁시다”라는 문구와 함께 광고를 냈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길도 있었다. 한 신문사 기자는 생활정보지에 나온 광고를 보고 김 회장에게 연락을 해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동료직원과 가족들의 반응도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특히 동료들은 그깟 100원짜리로 무엇을 하겠냐며 김 회장을 비웃었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보여주기식 선행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동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얼마나 하는지 두고 보자는 말도 많았다. 동료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어이, 저기 100원짜리 지나간다’라며 놀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상처가 됐다”

외롭게 시작한 나눔이지만 김 회장의 진심을 이해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적은 금액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다며 100원회 창립 취지를 성심껏 설명했다. ‘100원회’라는 이름도 초기 회원 모집에 큰 도움이 됐다.

“돈 100원인데 누가 얼마나 부담을 느끼겠나. 한 달이면 3000원, 일년이면 3만6500원이다. 하루 100원이라는 기부금액 덕분에 사람들도 부담없이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60여명이 모이자 김 회장은 행동에 돌입했다. 김 회장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재활용품 수거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음료수 캔 1만개를 모으기도 했는데 그 덕에 98년 말 ‘광주전남환경대상’에서 장려상에 선정돼 5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어차피 기부하려고 쓰지 않고 놔둔 돈이었는데 100원회 종잣돈으로 쓰면 딱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련된 50만원의 기금과 6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 1999년 4월 5일 100원회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100원회가 발족되던 해 김 회장은 농촌지역 동장으로 발령이 났다. 김 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동사무소는 행정단위의 최말단이다. 거기서는 서민들이 살아가는 천차만별의 모습들을 다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이웃들의 다양한 사연을 접하던 김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소외된 청소년들이었다. 100원회는 지난 2000년 구청에서 추천받은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식을 가진 이후 지금까지 매년 5월마다 빠지지 않고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김희만 회장이 100원회 소년소녀가장 장학금 전달식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장학금에서 시작된 100원회의 선행은 이후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생계 곤란을 겪고 있는 이웃에 대한 의료비 지원으로 확장됐다. 그 밖에도 불우이웃을 위한 생계비 및 월동비 지원, 독거노인 영정사진 무료 제작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작은 도움이라 하더라도 손을 내민 지 19년째. 어느새 하루 100원으로 시작된 100원회의 누적 성금은 2억여원으로 불어났다.

이처럼 하루 100원으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700명에 이르는 100원회 회원들의 노력 덕분이다. 김 회장은 100원회 회원 중 “돈 좀 벌고 넥타이 매는 사람은 없다.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들이나 예전에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노인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자녀들에게 나눔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참여한 어머니들도 많다고 한다.

“초창기에 3남매를 데리고 함께 100원회에 가입했던 어머님 한 분이 계신다. 얼마 전 그분과 통화를 했는데 아이들이 벌써 다 컸더라. 당시는 3남매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지금 딸 하나는 군대에서 중위로 근무하고 있고 다른 아이들도 대학을 졸업했다. 그렇게 성장하는 동안 3남매도 100원회 회원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공무원에서 퇴직한 후에도 김 회장의 삶은 100원회가 중심이 됐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공무원 재직 때는 체면이나 인간관계 때문에라도 기부를 해줬던 지인들이 2008년 퇴직하고 나니 대부분 기부를 끊었다는 것. 기부금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김 회장은 1톤 화물트럭을 사서 시간나는대로 재활용품을 수집하며 번 돈을 100원회 회비로 보탰다.

“트럭타고 재활용품을 수집하러 다니다가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나르는 할머님들을 뵈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지나다니다가 그런 노인 분들이 보이면 재활용품이 있어도 그냥 지나치게 된다. 전국적으로 폐지 줍는 독거노인이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나. 내가 좋은 일 하자고 그런 분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된다”

김 회장은 “한번만 하고 만다면 누구나 선뜻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이지 않으면 나눔은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나눔을 실천하는게 더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누구나 눈에 보이는 큰 도움을 생각하지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김 회장은 나눔에 동참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이에게 꿀팁도 줬다.

“예전에는 금전이나 물품을 주로 기부했지만 지금은 재능기부 등 나눔도 다양화됐다. 우선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나눔부터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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