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직장 내 성폭력이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6년 르노삼성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대의 모습. <사진=뉴시스>

[이코리아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피해를 폭로하면서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다수의 여성들이 사회연결망서비스에서 "#METOO" 등의 해시태그를 달며 피해 사례 폭로에 동참하는 등 점차 사회운동화되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서 검사의 폭로 이후 최근 변화된 사회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에서 성희롱 피해를 직접 당한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성희롱 사건이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제대로 처리될 수 있다는 신뢰가 낮은데다, 섣불리 피해 사실을 공론화할 경우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 직장 내 따돌림이나 업무상 불이익뿐만 아니라 사법·의료기관, 언론, 주변인들에 의한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뜻하는 ‘2차 피해’의 문제가 또 다른 서 검사의 출현을 가로막는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 성희롱 피해자, “참고 넘어갔다” 78%

여성가족부가 지난 2016년 발표한 ‘2015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을 경험한 피해자 500명 중 78.4%가 성희롱 피해대처 방식에 대한 질문에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 5건 중 4건에서 피해자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 피해자 중 사내 인사기구 및 외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0.9%에 불과했으며, 가해자에게 개인적인 사과를 요구한 경우도 겨우 6.8%였다.

이처럼 피해 사실의 공론화를 주저하는 이유는 남녀 간에 차이가 있다. 성희롱 피해를 참고 넘어갔다고 답한 남성 피해자 중 72.1%는 성희롱을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라고 답했지만, 여성 피해자는 같은 답변을 한 경우가 45.5%였다. 여성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51.6%)였다. 피해 사실을 밝히고 정당한 징계 절차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 분위기가 여성들에게 만연해있다는 의미다.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도 여성들이 더 컸다. 남성의 경우 “업무 및 인사고과 등의 불이익”을 고려한 경우가 불과 4.5%였으나, 여성의 경우 17.7%로 매우 높았다. 이 외에도 “소문,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14.5%, “대처방법을 잘 모름”이 14.5%로 뒤를 이었다. 섣불리 성희롱 피해에 대해 징계 절차 등을 요구했다가 오히려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 보직 변경, 퇴사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당할 수 있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지난 2016년 235명의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피해자의 57%가 피해 사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인해 회사로부터 불이익 조치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또한 72%의 피해자는 결국 회사를 그만 뒀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지난해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킨 한샘 성폭력 사태의 피해자도 지난 11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조직 구성원들의 시선과 따돌림도 피해 사실 공론화를 망설이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여성가족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2차 피해 경험 사례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주변에서 공감 또는 지지 없이 참으라고 함”(22.2%)였다. 성희롱 문제에 대한 직장 동료들의 이해와 공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론화를 시도할 경우, ‘문제아’로 낙인찍힐 확률이 높다. 피해자가 오히려 사태를 유발했다는 식의 책임 전가도 발생할 수 있다.

검찰 내 성폭력 문제를 폭로한 서 검사는 지난 1일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내면 전형적으로 연이어 터져 나오는 소문이 피해자의 업무 능력, 성격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며 “‘카더라’ 통신에 의한 조직 구성원들의 수근거림으로 피해자는 발가벗겨진다”고 2차 피해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서 검사가 이번 사건을 통해 좋은 보직으로 이동하려 한다거나, 평소 업무능력이 떨어졌다는 등의 루머가 돌면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기도 했다.

◇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 실제 효과는 글쎄?

그렇다면 현재 직장 내 성폭력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있을까. 대표적인 것은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다. 해당 개정안은 2016년 7월 제출됐으나 1년 이상 국회에 계류되다가 한샘 사태 이후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지난해 1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기존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 발생 시 사업주가 취해야할 조치나 피해자가 당할 수 있는 2차 피해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개정안에서는 사업주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실 확인과 더불어 근무지 변경, 유급휴가 등 피해자 보호를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의무화했다. 또한 피해자 및 신고자가 업무상 불이익이나 직장 내 따돌림 등의 피해를 당했을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부과하도록 징계도 강화했다.

강화된 개정안이 통과된 만큼 2차 피해에 대한 우려도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법률이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2013년 6월 르노삼성자동차 소속 여직원이 성희롱 가해자인 직속상사를 비롯해 회사, 인사팀 직원 등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좋은 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1년간 직속 상사의 성희롱에 시달리다 회사에 문제제기를 했으나, 오히려 사건을 담당한 인사팀 직원에게 폭언을 듣고 퇴사를 권유받는 등 불이익을 당했다. 이전까지 상위를 기록했던 인사고과도 최하등급으로 떨어졌고 중요 업무에서도 배제됐다.

하지만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 통과와 서 검사 폭로로 인한 사회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건은 고용노동부와 검찰의 외면 속에 4년이 넘게 방치된 상태다. 르노삼성 사건을 포함 직장 내 성폭력 2차 피해에 대한 진정은 지난 5년간 고용노동부에서 총 26건 접수됐으나, 이중 검찰이 사측을 기소한 사례는 겨우 2건에 불과하다. 2차 피해를 포함한 전체 성희롱 진정도 마찬가지다. 직장 내 성희롱 진정은 2012년 249건에서 2016년 552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중 과태료가 부과된 경우는 66건(12%)에 불과하다.

결국 기업과 사법기관에서 직장 내 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더라도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수 있다. 서 검사가 시작한 한국판 '#METOO' 운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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