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이번달 초 일본에서 재미있는 설문 결과가 발표됐다. 2017년 최고의 유행어 7위에 ‘가상화폐’가 선정된 것. 정부의 호의적 태도를 등에 업고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온 일본 가상화폐 거래시장과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결과다.

중국이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한 이래 일본은 전 세계 가상화폐 산업을 선도하는 국가로 인식돼왔다. 규모로만 따져도 엔화는 시가총액 1위 가상화폐인 비트코인 거래량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달러화에 1위 자리를 빼앗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엔화는 비트코인 거래량에서 50%에 가까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인식도 비슷하다. 가상화폐거래플랫폼 ‘웨이브즈’의 CEO 알렉산더 이바노프가 전 세계 678명의 투자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은 27%의 응답자들에게서 ‘2017년 가상화폐 산업을 선도할 국가’로 뽑혀 1위를 기록했다. 한국과 미국은 각각 15%로 그 뒤를 이었다

 

◇ 적극적인 일본 정부의 비트코인 끌어안기

이처럼 일본이 가상화폐 왕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가상화폐 끌어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가상화폐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 전 크게 데인 적이 있다. 일본에 본사를 둔 가상화폐 거래소 ‘마운트곡스’가 해킹을 당해 85만개의 비트코인을 잃어버리게 된 것. 당시 1비트코인이 550달러였던 점을 고려하면 총 4억6750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중국이나 러시아와는 전혀 방식을 택했다. 엄청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하기보다는 가상화폐 거래와 관련된 법안을 만들어 금융당국의 감시 하에 안전한 거래를 유도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 당시 집권당이었던 자민당은 가상화폐 관련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민간 자율규제를 통해 가상화폐 거래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기존 자금결제법에 가상화폐의 정의와 거래 관련 규정을 추가한 개정안을 만들어 2016년 5월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올해 4월부터 일본에서 이 법안이 시행되면서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는 명실 공히 법적인 결제수단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게다가 지난 7월에는 가상화폐 거래 시 부과되던 소비세 8%를 폐지해, 사실상 가상화폐를 하나의 ‘통화’로 인정했다. 이제 일본에서 가상화폐 거래에 부과되는 세금은 차익 실현에 따른 소득세뿐이다.

거래소 인가제도 일본 가상화폐 산업 발전에 큰 몫을 했다. 일본은 자금결제법 개정안을 통해 정부 인가를 받은 거래소만 운영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정부 인가를 신청하는 거래소에게 서버 및 자금 등의 운영능력, 고객보호장치, 정보공개, 제3자에 의한 정기 감사 등 다양한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거래소 인가제는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상승시켜 투자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은 지난 9월 11개의 거래소를 인가했으며 이달 1일에도 4개의 거래소를 추가 인가했다. 총 15개의 거래소가 정부 허가 하에 운영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도 추가적인 거래소 인가를 검토 중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난 9월 인가한 11개 거래소 외에도 17개의 거래소에 대한 추가 등록을 검토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 내용대로라면 아직도 13개의 거래소가 추가로 등록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의 가상화폐 친화적 태도를 알 수 있는 것은 ICO(신규가상화폐공개)규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현재 해외법인이 일본거주자를 대상으로 하는 ICO를 금지하고 있을 뿐 그 외의 ICO에 대해서는 정부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선에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ICO 관련 규제가 없다고 해도 민법, 상법, 소비자 보호법 등을 적용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일본은 ICO를 계획 중인 신규업체들에게 기회의 땅이다.

 

◇ 느슨한 규제, 역풍 불러올 수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일본의 가상화폐 산업은 크게 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몇몇 전문가들은 일본의 과도하게 느슨한 가상화폐 거래 규제가 장기적으로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블록체인기업 인디스퀘어의 공동창업자이자 일본의 가상화폐 연구자인 히가시 코지는 지난 11월 온라인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 정부의 가상화폐 개입이 엄격한 규제로 이어질까 걱정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며 일본의 규제가 자기 예상보다 훨씬 약한 수준이었다고 비판했다.

코지에 따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느슨하고 광범위한 가상화폐 정의다. 예를 들어 시가총액 165위인 가상화폐 ‘페페캐시’는 시가총액 1위인 비트코인과 동일하게 일본에서 1등급 가상화폐로 분류돼있다. 자금결제법 개정안의 모호한 가상화폐 정의가 낳은 명백한 오류다. 이 때문에 일반 투자자들은 마치 페페캐시가 비트코인처럼 공신력있는 가상화폐인 것으로 오해해 위험한 투자를 감행할 수 있다.

두 번째는 ICO 규제에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ICO 규제라면 정부당국의 엄격한 심사와 허가 없이 신규가상화폐를 발행·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아예 ICO 자체가 금지돼있다. 하지만 코지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이러한 규제를 간단하게 회피할 수 있다. 신규가상화폐 발행 시 법적 책임이나 보상에 대한 내용을 약관에 명시하지 않으면 된다. 이 경우 투자자와 발행자가 금전과 가상화폐를 교환하는 행위는 마치 기부금을 받고 그 증표로 신규코인을 나눠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코지가 지적한 것은 해외 가상화폐 기업의 ICO에 대해 일본의 규제를 적용할 수단이 없으며, 거기에 참여하는 일본 투자자들에게 피해가 발생하도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을 방문해 신규가상화폐의 미래 고객을 모으는 해외기업을 제어할 방법도, 투기 심리로 인해 해외 ICO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일본 투자자들을 진정시킬 방법도 현행 법안에는 마련돼 있지 않다.

 

◇ 가상화폐 천국인가, 지옥인가

현재 일본이 가상화폐 산업과 관련해 선택한 경로의 끝이 어디로 다다를지는 아직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히가시 코지는 일본 가상화폐 규제가 특히 ICO와 관련해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장래 일본에서 가짜 가상화폐의 신규 발행으로 인한 사고가 터질 위험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반면 정부의 가상화폐 산업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가 오히려 위험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민간의 자율적인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의 든든한 지원으로 인해 가상화폐 거래나 파생상품이 발전하고 있는 만큼,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방책도 민간에서 개발될 수 있다는 것. 일본의 보험사 미쓰이스미토모해상화재보험은 지난 11월 가상화폐가 해킹으로 도난당할 경우 피해액을 보상해주는 가상화폐 보험상품을 출시했다. 지난 25일에는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이 가상화폐 거래소 파산에서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상화폐 신탁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시작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의 선택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만약 일본 정부의 기대대로 선순환이 이뤄진다면 민간 자율로 리스크는 관리되고 산업은 성장에 경제효과가 발생하는 이상적인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민간의 자율적 위험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느슨한 규제로 투기심리만 증폭된다면, 일본이 가상화폐의 천국에서 지옥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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