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유엔총회가 21일(현지시간) 예루살렘 결의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미국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총회는 21일 긴급회의를 열고 예루살렘의 지위 변화를 야기하는 모든 조치에 반대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이전에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됐으나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유엔총회로 넘어오게 됐다. 이번 긴급회의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128개국이 찬성표를 던졌으며, 기권은 35개국, 불참은 21개국이었다. 반대국가는 예루살렘 문제의 당사자인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롯해 과테말라, 온두라스, 마샬군도, 미크로네시아, 나우루, 팔라우, 토고 등 9개국에 불과했다.

미국은 이번 유엔표결에 앞서 예루살렘 결의안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뜻을 회원국에게 전달했다. 특히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표결 하루 전인 20일 자신의 트위터에 “목요일에 우리의 선택을 비난하는 표결이 있다. 미국은 (결의안에 찬성하는 회원국들의) 명단을 만들 것”이라며 위협적인 글을 올렸다. 헤일리 대사는 21일 표결 직전에도 “미국은 주권국가로서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총회장에서 공격대상으로 지목된 이 날을 기억할 것”이라며 “(유엔에) 큰 기여를 하라고 다시 한 번 요청받을 때 이것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헤일리 대사의 발언은 외교무대에서는 상당히 무례한 것으로, 마치 과거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완전한 파괴”와 같은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20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들이 우리에게 수십억 달러를 가져가면서 우리에 반대해 표를 던진다. 반대표를 던질테면 던지라고 하라. 우리는 (돈을) 엄청 아끼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결의안에 찬성한 국가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삭감하겠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인정 발언으로 벌어진 이번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과 헤일리 대사가 국제사회를 상대로 위협적인 언사를 남발하면서 악화일로에 들어섰다. 미 언론과 전문가들은 예루살렘 결의안 통과가 미국의 외교적 고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재정·군사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유엔 회원국 대부분이 미국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찬성표를 던졌다. CNN의 21일 보도에 따르면 이집트는 미 국방부의 해외군사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이집트 국방 예산의 약 20%~25%에 해당하는 11억 달러를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는 지난 16일 안보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인정 발언을 반박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2016년 기준 미국국제개발처(USAID) 지원규모 상위 10개국도 단 2개국을 제외하면 모두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기권한 남수단과 불참한 케냐를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시리아, 요르단,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이라크, 콩고 등 8개국은 재정지원을 철회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결의안을 지지했다.

이처럼 다수의 국가들에게 미국의 지원 철회 위협이 효력이 없는 이유는 미국의 해외지원이 미국의 안보와 직결돼있어 함부로 중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키스탄, 이집트, 요르단 등 미 국방부 지원 규모 상위권에 위치하는 국가들은 모두 중동문제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핵심적인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것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주로 경제, 인도주의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아프리카도 지원 철회는 쉽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중국에게 이 지역에서의 리더십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해외지원 상위 10개국 중 7개국이 아프리카 국가일 정도로 아프리카 지원에 공을 들여왔다. USAID 지원규모 2위인 에티오피아의 경우 지난 2000년~2014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약 154억달러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연간 1억달러 규모로, USAID가 지난해 에티오피아에 지원한 금액 8억5400만달러보다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갑작스런 해외지원 중단은 외교적 고립과 안보약화를 불러올 위험이 크다. 전문가들은 이번 유엔 총회에 대한 미국의 협박성 외교전략이 오히려 미국의 입지만 좁혔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CNN의 군사·외교분석가 존 커비는 21일 논설을 통해 “해외 원조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와 동맹의 안전에 핵심적이다. 우리는 경제, 개발, 안보, 인도주의적 지원 등 다양한 국가의 필요에 기여함으로서 이 나라들이 역내 불안정을 야기하는 더 크고 장기적인 문제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장한다”며 트럼프 정부의 해외지원 중단 위협을 강하게 비판했다.

전 유엔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에드워드 모티머 또한 21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강대국들은 깡패처럼 구는 경향이 있다. 미국이 ‘깡패’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미국의 방식은 섬세하지 못하며 아마도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럽외교협회(ECFR)의 유엔 전문가 리처드 고완은 “유엔 회원국 대다수가 국제법과 팔레스타인의 고결한 수호자임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관계국들의 외교적 승리다”라며 미국의 외교전략을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