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계로 성추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일관된 무대응으로 비난을 사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코리아] 영화계에서 시작된 성추행 파문이 미국 정계까지 확산된 가운데,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기간 동안 각종 성추문에 휩싸인 바 있어, 성추행 파문이 백악관까지 번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성추행 파문은 영화계에서 시작됐다. 지난 10월, 몇몇 여성들이 미국 영화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고발했던 것. 당시 피해자 중에는 기네스 팰트로, 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해 7조원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프랑스의 명문 세두 가문의 일원 레아 세두까지 포함돼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계에서 시작된 성추행 파문은 스포츠계를 거쳐 정치권까지 이르렀다. 처음 논란이 된 것은 미 공화당의 앨라배마주 상원의원 보궐선거 후보인 로이 무어 전 앨라배마주 대법원장이다. 워싱턴포스트는 9일(현지시간), 무어 후보가 38년 전 10대 소녀 4명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이후 무어 후보로부터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무어 후보가 선거에서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아버지 부시’로 친숙한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도 성추행 파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슬리 코리건이라는 여성은 13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통해 2003년 부시 전 대통령이 사진 촬영 중 당시 16세였던 자신의 엉덩이를 만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악의 없이 토닥거린 것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대중의 시선은 차갑다.

공화당 출신 정치인들의 성추문을 비난하던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앨 프랭큰 민주당 상원의원(미네소타주)은 11년 전 여성 방송인을 성추행했던 사실이 발각됐다. 라디오 진행자인 리앤 트위든은 16일 로스앤젤레스 KABC 라디오 방송에서 2006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프랭큰 의원이 강제로 키스와 신체 접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의자에서 잠든 트위든의 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웃고있는 프랭큰 의원의 사진까지 공개되자, 프랭큰 의원은 “저 리앤을 비롯해 투어에 함께 했던 다른 모든 사람, 나와 함께 일하고 내가 대변하는 사람들, 나를 믿어준 모든 이에게 사과하고 싶다”며 진화에 나섰다.

이처럼 성추문으로 정치권이 흔들리자 공화·민주 양 당 지도부는 황급히 사태 수습에 나서고 있다. 공화당전국위원회(RNC)는 무어 후보에게 선거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으며, 패티 머레이 민주당 상원의원(워싱턴) 또한 “(프랭큰 의원에 대한) 윤리위원회 차원의 조사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14일 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성추문과 관련해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지난 15일 아시아 순방의 성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로이 무어의 거취에 대한 질문이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답변을 거부한 채 기자회견을 마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심리적 압박을 느꼈는지 두 차례나 물을 마시며 기자회견을 중단하기도 했다.

미국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미국 정계에서 가장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앨라배마 상원 선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무책임한 대응을 비난했다. 폴리티코는 후보 사퇴를 거부한 로이 무어와 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의원 등의 당내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역효과를 우려해 사태 개입을 꺼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CNN의 크리스 실리자 편집장은 16일 논평을 내 트럼프 대통령은 도덕적 감각이 없으며, 이로 인해 미국 정치권에 도덕적 공백(Moral Vacuum)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닉슨대통령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리더십을 (알면서도) 무시했지만, 트럼프는 아예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실리자 편집장은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성추문에 대한 무대응이 지난 8월13일 발생한 샬럿빌 사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방식과 일맥상통한다고 분석했다. 백인우월주의자 남성이 인종차별반대 시위대에 차량을 몰고 돌진했던 샬럿빌 사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진영으로부터의 폭력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인종차별반대 시위대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발언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실리자 편집장은 “이는 도덕적 권위가 결여된 일종의 도덕적 상대주의”라며 “트럼프의 도덕적 나침반은 정치적 반대파에 따라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성추문과 같은 사안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도덕규범이 아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대응한다는 것. 실리자는 “민주당이 성추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해도 (트럼프의) 올바른 답변은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샬럿빌에 대한 불충분한 대응에 대해 비난받는다면, 트럼프는 자신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11명의 여성이 트럼프의 성추문을 연이어 폭로해 곤혹을 치른 바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성추문 폭로 여성들에 대해 “끔찍한 거짓말쟁이”라며 모든 혐의를 강경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이번 정치권의 성추문이 이슈화될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 성추문에 대한 관심도 다시 점화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된 무대응이 성추문 사태를 진정시킬지,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게 될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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