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마련된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이코리아]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핸드폰 요금이 너무 부담스러워요. 통신비 인하가 절실합니다.”

“10만원권이 나오면 서민들만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요?”

“포항 지진 때문에 불안합니다. 내진설계를 전국적으로 의무화해야 합니다.”

“○○기업에서 남편이 갑작스레 해고를 당했습니다.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네요.”

“신태용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을 경질하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을 다시 데려와야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에 어울릴 것 같은 이 글들은 지난 몇 달 간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일반 시민들의 청원 내용이다. 청와대는 지난 8월19일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국정철학을 바탕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게시판을 선보였다. 특히 30일간 2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의 경우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각 부처 장관, 대통령 수석 비서관, 특별보좌관 등)이 직접 청원 내용에 대해 답변을 해준다.

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청원게시판이 열린 8월19일부터 오늘까지 91일간 올라온 청원은 총 4만4559개로 하루 평균 약 490개에 해당한다.

지난 9월25일에는 최초로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소년법 개정 청원’에 대해 조국 민정수석과 김수현 사회수석이 직접 답변하기도 했다. “청소년이란 이유로 보호법을 악용하는 잔인무도한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반드시 청소년 보호법은 폐지해야합니다”라는 제목으로 9월3일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온 이 글은 총 29만6330명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가 정한 답변 요건을 충족했다.

또한 지난 9월30일 게시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청원도 23만5372명의 동의를 얻어 현재 청와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청원은 지난 9월6일 게시된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다. 아동 강간 및 상해 혐의로 수감 중인 조두순은 출소를 3년 앞두고 있다. 이 청원은 조두순의 출소를 금지하고 재심을 통해 무기징역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17일 현재 50만6837명의 동의를 얻고 있다. 청원게시판이 열린 뒤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그 밖에도 지난 8월 말에는 여성 군복무를 의무화해야한다는 청원이 게시돼 12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으나 20만명을 채우지 못해 정부의 답변을 받지 못했다. 미완료 청원 중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출국 금지 청원이 9만498명, 주취감형(술을 마시고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 형벌을 경감하는 것) 폐지 청원이 6만9394명, 경사진 주차장에 경고문구 의무화 및 자동차 보조제동장치 의무화 청원이 5만6020명 순이다.

이처럼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는 취지로 연 국민청원 게시판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기존 온라인커뮤니티의 고발게시판이나 국민신문고, 국민권익위원회에 올라오던 억울한 사연이나 불만사항들이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으로 향하게 된 것.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다양한 내용의 청원이 몰리면서, 정작 중요한 청원이 묻히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이 때문에 청원게시판에는 진정성 있는 청원보다는 개인적 원한이나 편향된 신념에 따른 요구, 장난성 청원들이 다수 올라와 게시판을 흐리고 있다. “청년들에게 모자라는 데이트 비용을 지급해달라”, “취업준비생에게 정부가 노트북을 지급하라”라는 요구부터 “문재인 대통령은 여자 연예인과 사진을 촬영하지 말라”, “김정숙 여사가 혀 내미는 동영상을 방송으로 내보내달라”는 장난성 청원이 수시로 올라와 정부의 답변이 필요한 중요 청원들에 대한 주목도는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심지어 지난 16일에는 “군내 위안부를 재창설하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와 많은 누리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해당 청원은 현재 삭제됐으나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같은 날 “군내 위안부 재창설하라는 청원자를 처벌하라”는 청원을 올라와 4만1651명의 동의를 받았다.

중복투표가 가능해 국민청원으로 여론을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문제다. 현재 국민청원 게시판은 따로 회원가입을 하지 않고 페이스북·트위터·네이버·카카오 등 SNS 및 포탈사이트의 계정을 통해 로그인할 수 있게 돼있다. 문제는 한 사람이 4가지 계정으로 중복해서 로그인하는 것이 가능해 특정 청원에 몰표를 줄 수 있다는 것. 한 누리꾼은 자신의 SNS에서 국민청원 게시판의 한 청원에 12번이나 동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9월에는 여성 군복무 의무화 청원에 친박단체들이 조직적으로 가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한 여론조작 위험이 현실화되기도 했다. 당시 친박단체 회원들은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을 통해 “여성 군복무 이슈화를 통해 젊은 여성들의 높은 문재인의 지지도를 떨어뜨릴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군복무기간 단축논의를 방지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공유하며 여성 군복무 청원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답변 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청와대의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 요건은 ‘30일 내 동의 20만회 이상’ 이다. 하지만 8월19일 게시된 이후 현재까지 이 요건을 충족시킨 청원은 ‘소년법 개정’, ‘낙태법 폐지 및 자연유산 유도약 도입’, ‘조두순 출소 금지’ 등 3건 뿐이다. 한 누리꾼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외국인도 청원이 가능한 미국 백악관의 청원페이지도 답변기준이 30일간 동의 10만회다”라며 청원 답변기준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청원을 올려 30명으로부터 동의를 받았다.

이처럼 부작용이 심해지자 청원게시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누리꾼들도 게시판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한 청원을 하나로 묶고 항목화해 중요한 청원이 묻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본인인증서비스를 통해 1인 1투표 원칙이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장난성 청원에 대해서도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