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초하면서 부드러운 이미지의 탤런트 한혜진(31)이 스릴러 ‘용서는 없다’(2010) 이후 2년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휴먼 액션 ‘26년’(감독 조근현)을 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난 6월, 나도 모르게 내뱉은 한 마디는 “왜?”였다.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에 연관된 국가대표 사격선수, 조직폭력배, 현직 경찰관, 대기업 총수, 사설 경호업체 실장이 26년 후 바로 그날,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을 단죄하기 위해 벌이는 극비 프로젝트를 그린 강풀(38)의 동명 웹툰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한혜진은 5·18 희생자의 유족인 사격선수 ‘심미진’을 열연했다.

단순 피해자였다면 덜 그랬겠지만, 직접 그 사람을 암살하기 위해 총구를 겨누는 역할이니 더욱 그러했다. 아직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보니 정치적 논란을 벗어날 수 없다. ‘한창 잘 나가는 스타급 연예인이 뭐가 아쉬워서’라는 당연한 의문과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라는 우려가 뒤따랐다.

게다가 그 영화가 흥행이 잘된다면 좋겠지만 행여 흥행에 실패한다면, 아니 이미 한 차례 투자 유치에 실패하면서 제작이 무산됐던 영화다 보니 이번에는 제작이 될 수 있을는지에 대해 의문도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제작됐고, 11월29일 개봉해 2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300만 관객을 눈 앞에 두는 등 흥행에도 성공했다. 한혜진을 걱정했던 주위 사람들과 팬들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넘어 용기 있는 선택의 결실에 박수를 보내야 할 정도다.

한혜진은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은 몰랐어요”라고 운을 떼었다. “사실 우리 영화는 촬영 전부터 화제가 되고, 주목도 받는 등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지만 그래도 영화는 영화니까요. 요즘 관객 수준이 워낙 높아져서 아무리 사회적으로 주목 받는 영화라 해도 영화 자체로서의 재미도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쉽게 놓지는 못했어요. 다만 열심히 촬영했고, 잘 만들었으니까 제대로 평가 받기를 바랐을 뿐이죠”라고 털어놓았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주인은 따로 있다. 당초 이 영화는 2008년 처음 제작을 준비할 당시 신미진으로 김아중(31)이 캐스팅됐다. 그러다 크랭크인 10여일을 앞두고 돌연 투자 취소로 제작이 무산됐고, 새로 제작을 준비할 때 김아중은 이미 다른 작품에 캐스팅된 탓에 참여하지 못했다. 김아중은 6일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나의 PS파트너’(감독 변성현)로 자신이 여주인공을 맡았을 수도 있는 ‘26년’을 맹추격 중이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한혜진은 “제작 두레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26년’이 제작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진구 오빠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원래 저는 진구라는 배우를 무척 좋아했어요. 연기도 잘하고, 진중하고 묵직한 느낌도 좋기 때문이죠. 그런 오빠의 캐스팅 소식을 들으니 ‘왜 나한테는 연락이 안 오지?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진구 오빠랑 공연하면 참 좋겠다’고 조바심이 나더라구요. 얼마 뒤 회사에서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면서 보여줬는데 그게 ‘26년’이었어요.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하겠다고 했죠. 누가 채갈까봐 불안할 정도였답니다.”

심미진을 맡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영화를 영화로, 배우를 배우로 보지 않는 일각의 유아적 사고 탓이다. 혹시 작품이나 CF 출연에 불이익을 받을는지에 대한 걱정이 따른 이유다.

한혜진은 “저는 사실 그런 걱정을 안 했는데 출연 결정을 한 뒤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해주셨어요. ‘피해를 보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각오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구요”라면서도 “다행히 아직까지 불이익을 받은 것은 없어요”라고 일축했다. 다만 “악성댓글은 피할 수 없네요”라고 고백했다.

“트위터에 ‘좋아했는데 실망이다’, ‘이용당하는 거다’, ‘선동하지 마라’ 등 악성댓글이 달리죠.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냥 차단해요. 저도 사람이니까 안 좋은 이야기 올라오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분들은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드린다고 해도 바뀔 것도 아니고요.”

악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격려 댓글이 더 많아요. 8대 2 정도죠. ‘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 팬이 됐다’, ‘심미진 때문에 너무 아팠다’며 팬 카페에 가입하는 분들도 많아졌죠. 악성댓글을 보고 속상했던 마음이 격려댓글을 보면서 뿌듯해지고 용기도 생겨요.”

한혜진은 1981년생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태어난 만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 작품을 준비하고 출연하면서 더 많이 알게 됐다.

“5·18은 교과서에 몇 줄 나오지 않죠. 물론 8·15와 5·18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요. 영화를 하고 나서 비로소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아 내가 그 동안 극히 일부분을 알고 있었구나. 부끄럽다’는 생각과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5·18은 피해자인 광주시민은 물론 국방의 의무를 지다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돼야 했던 계엄군, 이런 비극적인 사실을 모른 채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질 때까지 살아야 했고, 지금도 지역감정에 휘말려 살아야 하는 온 국민도 넓은 의미의 피해자다. SBS TV 토크쇼 ‘힐링캠프’의 안방아씨로 차분하고 편안하게 출연자를 따사롭게 보듬어주고 있는 한혜진이기에 또 다른 기대를 품게 된다.

“저는 우리 영화를 통해 모든 피해자들에게 힐링을 드리고 싶습니다. 광주의 유가족들에게는 ‘국민 모두가 당신들의 아픔을 깨닫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고. 계엄군이었던 분들의 숨겨진 상처도 감싸 안아드리고 싶어요. 저는 우리 영화에서 ‘마상열’이 그 사람을 향해 외치던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살아서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대사가 너무 가슴 아팠어요. 그 분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희생자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모두가 진심으로 서로를 감싸 안고 행복한 내일을 향해 열심히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께 전하고 싶은 힐링입니다.”


 

저작권자 ©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