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로 관객을 아프게 만들어야 했어.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고민했던 것이, 글로 묘사한 걸 영상화했을 때 과연 관객들이 아파할 수 있을지…. 만약 아파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실패인 거지."

정지영(66) 감독의 말대로라면 영화 '남영동 1985'은 성공이다. 106분 동안 관객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다. 정 감독은 "관객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파해주고 슬퍼하고 공감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힘들었던 만큼 보람이 느껴진다"며 미소를 지었다.

'남영동 1985'는 정치인 김근태(1947~2011)가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당한 22일 간의 고문을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박원상)는 빨갱이로 지목돼 눈이 가려진 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다.

정 감독은 "고문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이뤄낸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내 일이 아니라고 지나치면서 침묵하고 있다. 그분들의 소중함, 침묵하거나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은 관객들도 똑같이 아파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사회는 한국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얻어낸 민주주의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선배들이 어떻게 이 민주주의를 지켜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문에 관한 얘기를 오래전부터 준비했지만 고민이 앞섰다. 어느 누가 대역 없이 고문을 견뎌줄지에도 확신이 없었다. 다행히 전작 '부러진 화살'에서 '박준 변호사'로 한차례 호흡을 맞춘 박원상(42)이 나서줬다.

"우선,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 걱정이 많았어. 어쨌든 사람이 연기해야 하는 작업이잖아. 그래서 잘 찍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 요령도 없는데 찍긴 찍어야 하고…. 얼굴에다가 물고문을 가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 견뎌준 박원상이 고맙고 미안해. 이걸 해낼 수 있는 연기자들이 얼마나 있겠어. 한 두 차례 찍고 다 손들고 도망가지."

영화 속 물과 전기, 그리고 별의별 고문을 연기하는 것조차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실제 고문은 더했기 때문이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특수한 고문을 보여주는 것은 영화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최대한 보편적인 고문만을 담았다. 볼펜 심을 성기 요도에 넣는 것, 바늘로 손톱 끝을 찌르는 등 엽기적인 고문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런 고문까지 묘사하는 것은 보여주기 위한 고문일 가능성 때문에 피했다. 누구에게나 가해진 고문만 가지고 관객들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정 감독은 "우리에게는 과거지만 아직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문 피해자 치유 모임도 있다. 많은 사람이 상담을 통해 치유됐다. 방법은 물리치료 같은 게 아니라 끊임없이 그때의 기억과 맞닿고 부딪히는 것이다. 감추면 치유가 안 된다. 마음속 깊이 처박아 놓으면 정신병이 된다. 어떤 충격적 자극이 숨어 있다가 문뜩 뛰쳐나와서 돌발 현상을 일으키는 게 바로 정신병이다. 그것을 체화시켜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영화를 만든 가장 큰 이유도 덮어뒀다가는 우리 역사가 곪는다는 점에 있다. 터지면 되는데 터지지 못하고 굳어버린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역사도 병든 역사가 된다. 고문받은 사람들의 모임도 똑같다. 많은 사람이 서슴없이 얘기해야 한다. 아직도 두려워서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하는 게 두렵고 경찰이 감시하는 게 아닌지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분들도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영화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체를 정면에서 응시하고 강도 높은 고문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했음에도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정 감독은 "12세 관람가가 되기를 바랐다"며 크게 웃었다. "중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잔혹하고 끔찍한 동영상들을 접한다. 앞과 뒤가 연결돼있지 않은 영상이다. 시각적으로 그들에게 익숙할 수 있으며 아무런 죄의식을 주지 않는다. 박원상의 나체가 문제라고? 그건 어렸을 때 엄마아빠 손잡고 간 목욕탕에서 이미 경험한 것들이다. 그게 무슨 선정성이고 음란성이냐. 12세 이상이 보면서 앞과 뒤의 맥락을 읽고 현대사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22일 개봉한다. 개봉시기를 저울질한 듯하다. "마케팅팀에서 정한 날짜다. 영화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은 무시해도 된다. 예전부터 만들고 싶었던 영화다. 또 어떻게 사람들이 오해를 안 받고 살겠느냐?"고 반문했다.

"단지, 이 영화를 관객들이 아프고 슬프게 봐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 형제들과 나눴으면 좋겠지. 3000만 국민이 함께 아프고 슬퍼하는 영화가 됐으면 하는 게 내 목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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