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제주여고 부근이다. 거기, 그러니까 제주여고 4거리에서 바다 방향으로 좀 가면 중앙여고가 나오고, 이어서 같은 방향으로 더 가다 보면 법원 검찰청, 시청, 칼 호텔, 남문 로터리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초등학교 1학년 꼬마들처럼 착하게 줄지어 나타난다.남문 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석축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제주성지다. 알다시피 ‘지(址)’는 ‘터’를 뜻한다. 그러니까 제주성지는 제주성(濟州城)이 있던 터다. 지금도 탑동 바다를 내려다 보며 동서로 늘어서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20분 채 안 걸리는 거리, 삼별초가 진도에서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후 제주로 와 자리 잡은 최후거점.삼별초(三別抄)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 때의 특수군으로 야별초(좌별초, 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야별초는 처음에는 도둑의 무리를 막고 개경을 지키기 위해 선발한 집단이다. 그런데 도둑의 무리가 갈수록 늘어나자 인원을 더 충원해 부대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눈다. 그 이후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또 하나의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했는데, 삼별초는 이 세 부대를 합쳐서
오늘은 지난 번 4·3평화공원에서 알게 된 중학생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특별한 날이다.약속시간보다 10분쯤 일찍 도착했는데 친구들은 이미 와 있다. 4·3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와 상관 없이 우리는 소풍 나온 기분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들처럼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우리가 만난 곳은 제주시 조천읍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북촌리의 너븐숭이다. 너븐숭이는 널따란 돌밭이라는 제주어다.바닷가 마을 건너편에 물수제비를 뜨면 두어 번 퐁당거리다 돌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사람 살지 않는 작은 섬 하나가 사시사
9시 개관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도 4·3평화공원은 북적였다. 주말을 맞아 단체로 체험학습을 하러 온 청소년들이 마치 큰집 제삿날에 만난 사촌들처럼 웃고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인 낭패감과 짜증이 밀려와 한 마디 하고 싶었다.‘이놈들 좀 조용히 하자. 여기에 소풍 온 것도 아니고....’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시원하고 조용한 곳을 바란다면 차라리 숲속으로 가든 카페를 가면 될 것을, 나는 왜 자꾸 엉뚱한 데 와서 ‘꼰대’ 같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나?사실 오전부터 섭씨 30도 가까이 오르는 땡볕 더위와 정확히 까닭을 알 수
오랜만에 서울서 내려왔다는 선배의 연락을 받고 훌쩍 서귀포로 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날을 잡아 이중섭이 처자를 데리고 와 잠시 살던 곳을 꼭 보고 싶던 차라 잘 됐다 싶었다.늦은 밤까지 막걸리로 회포를 풀고 이튿날 일어나 거리로 나섰다.서귀포항에서 매일올레시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이중섭거리’다.중섭은 1·4후퇴 때 부산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서귀포에 도착한다. 중섭에게 있어 서귀포는 따뜻한 남쪽이었다.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지어준 한국식 이름 남덕(南德)에 ‘남녘 남南’이 들어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1135번 도로인 평화로를 타고 가다 보면 쇠북같이 우뚝한 산방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갈래길에서 우측 길로 접어들면 잠시 후 바닷가 못미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대정이 ‘추사유배지’라는 이정표로 맞이한다. 깨끗하게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 기념관이다.어째서 입구가 지하로부터 시작할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추사가 8년여의 유배생활을 한 곳은 대정읍성의 담장 안쪽이다. 그러니 성지에 기세 좋은 건축물을 짓는 것을 일부러 피했을 것이다.지하층에서 관
어느 틈엔가 걷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나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다. 운전 중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걸으면서 주변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간판이나 이정표를 눈여겨 보곤 하게 되었다. 재미 있는 간판이 보이면 무슨 가게일까 추측도 해 보고, 낯선 이름의 이정표를 발견하면 나름대로 어원을 꿰맞춰 보기도 한다. 그러다 우리 동네 부근에 ‘황새왓’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것과 거기에 공원묘지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걸어 들어오다 보면 동네 어귀 자그마한 4거리에 6-7개의 화살표가 이
제주시 서쪽 평화로를 따라 가다 보면 평화로운 마을 유수암이 나온다. 북으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한라산이 올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용천수인 유수암천이 사시사철 흐르고 주변에는 무환자나무와 팽나무군락지가 마을을 보호하고 있으니 명당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유수암 휴게소 입구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가다보면 유수암주유소가 나오는데 거기서 남쪽으로 300m 정도 거리에 라는 안내표지석이 나온다.홍윤애는 제주목사 조정철이 사랑한 여인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
제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는 없는 게 바로 돌이다.제주도는 온통 검은색 돌의 세상이다. 오래 전 화산이 폭발해 흘러넘친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현무암이다. 돌은 거무튀튀한 색깔에다 바람 빠진 구멍까지 숭숭 뚫려있어 보기에도 그렇고 쓸모도 없을 것 같다. 거기다가 매끈한 곳이 단 한 곳도 없이 거칠고 제멋대로 생겨 정이 가질 않는다. 섬 전체가 그러다 보니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식수조차 구하기 힘들고 토양도 거칠어 농작물 재배도 어렵다.안무어사로 제주도에 왔던 김상헌의 『남사록』 〈풍물편〉의 기록에는 ‘제주의 백성은 곤궁한 자
제주를 흔히 ‘신(神)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제주에 1만 8천의 신이 살고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제주에는 또 ‘당(堂)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절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당은 최소한 마을마다 한 개씩은 있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 하다. 제주에서 민간신앙인 무속이 얼마나 생활 속에 뿌리내렸는가를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육지와 동떨어진 섬, 특히 거센 바람과 돌투성이, 그리고 변덕 심한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섬사람들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신(神)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동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가 완만한 반면 남북으로는 급경사를 이룬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남북으로 오가는 여섯 개 도로와 그것을 다시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록도로가 있는데,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중산간 아래쪽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산 위쪽에 죽은 이들의 안식처가 있으니 산 사람들과 죽은 영혼들이 사이 좋게 영역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지만 제주도만큼 죽은 이들을 산 사람만큼 대접해 주는 곳도 드문 것 같다.각설.지석묘, 돌멘이라고도 부르는 고인돌이 제주도에서 170여 기나
신화의 세계에서 나오니 선사시대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선사시대(先史時代)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시대이니 그 때의 생활상을 증언해 주는 것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이다. 예를 들어 화석이나 집자리터, 돌무덤, 벽화, 조개껍데기, 각종 그릇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지난 2003년 10월에 제주도에서 5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발자국이 발견됐습니다. 말과 코끼리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화석도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세계에서는 7번째입니다.한국교
나는 제주를 여행하고 있다‘이번에는 담배를 끊고 술은 일주일에 딱 한 번만 마시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가도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무심결에 손가락꺾기를 한 번 했다가 버릇이 되어 나중에는 발가락꺾기, 목꺾기까지 일상이 된 사람이 있다. 내가 제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게 된 것은 후자와 비슷한 경우다.얼마 전 딸아이가 무슨 행사에서 경품으로 탄 자전거를 끌고 온 적이 있다. 튜브에 바람을 넣어달라기에 끌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심파적으로 한 번 타봤다.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으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걷거나 차를